골방 지은이 : 박범신 골 방 - 흰 소가 끄는 수레 3 1 혹은 낡은 책장 뒤로 감춰진, 혹은 음습한 무덤 안에 밀폐된, 혹은 바람 속의 진애(塵埃)로 떠돌던 신화의 파편들을 끈질기게 채집해 달의 상징성 과 여성의 본원을 결합시켜, 인간 영혼의 밑바닥에 잠복한 심리적 원형을 떠오르게 하는 저서들로 유명한 에스터 하딩(Esther harding)은 그녀의 명 저 [사랑의 이해]에서 달은 <은혜로운 존재>라고 썼다. 많은 원시 종족들 은 거의 신앙처럼 달이 씨앗을 싹트게 하며 초목을 자라게 한다고 믿었다 는 것이다. 그녀는 달이 없다면, 이라고 썼다. 만약 달이 없다면 짐승들은 새끼를 배지 못할 것이고 여성들은 아기를 낳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달이 여성들의 자궁 속에 생명의 씨앗을 쏘아보낸다고 여겼던 원시 종족들의 신 화에 대해 그녀, 에스터 하딩은 또한 이렇게 썼다. ... 나이지리아인들은 아기를 갖기 위해 남편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남성 기능은 여성의 처 녀막을 찢어 여성을 몸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아기를 가지게 하는건 달 이므로-통로를 넓혀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종족도 있다... 여성의 생리 리듬과 월주기가 일치한다는... 풍성한 수확. 가축들의 다산. 그리고 특히 자손들의 번성... 잘은 짧은 기간 동안만 자라난다... 달없는 밤... 검은 달... 파괴적인 힘은 절정에 달하고... 홀수와 폭풍우... 유령들은 소리지르며 공중을 날아다니고... 보름달이 뜨는 날 묘지에서 잡은 토끼의 발은 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과 증오에 있어서 암컷은 수 컷보다 더욱 집요하다... 여신은 풍요롭고 잔인하고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맹목적 힘... 음의 원칙은 어둡고 흐릿하고 차고... 이빨과 발톱으로 먹이 를 움켜쥘 채비를 하고서... 월경이 대한 금기는 신성하다는 뜻과 불길하 다는 두 가지 뜻... 신성하다는 뜻과 불길하다는 두 가지 뜻... 그녀. [사 랑의 이해] 저자인 에스팅 하딩은 여성들에게 아기를 가져다주기 위해 달 이 지상에 달새를 보낸다는 신화에 대해서도 썼다. 달빛을 받으면 꺼져 있 는 여인의 배가 통통해져서 속이 가득 찰 것이라고도 신선하다는 뜻과 불 길하다는 두 가지 뜻... 이라고. 2 막둥이 방을 큰애 방으로 바꾸어줄까 봐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서울 세검정 집에 있고, 나는 용인 변방 굴암산의 서쪽 자락 외딴 오두막 에 혼자 있었다. 창 때문이에요, 라고 아내는 덧붙였다. 나는 수화기를 바 꿔쥐면서 오두막 동창에 들어와 앉은 잎 떨어진 감나무와 빈 텃밭과 암회 색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세, 어떤 전문가가 텔레비젼에서 나와서 그러는데요, 창이 너무 넓으면 애들이 산만해진대요. 더구나 막둥이 방은 동쪽 남쪽이 온통 창이니 방이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주의 집중이 안 될 만하지요. 빈 텃밭의 밭둑엔 억새풀들이 도열하듯 선 채 바람에 가만가만 흔들이고 있었다. 막둥이 방 밑으로 수맥이 흐르고 있어 문제라든가. 막둥 이 방의 방위가 잘못 놓여 액막이라도 해야 된다 하는 것보다는 설득력이 있는 논리였다. 그러지 뭐,라고 내가 대답할 때 억새풀들의 풀씨들이 훅, 날렸다.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런데 애가 말을 안 들어요. 저는 제 방이 좋다는 거예요. 당신이 한번 올라와 애 좀 설득해줘요. 새 몇마리 동편 숲 에서부터 날아와 자맥질하듯 빈 텃밭에 내려앉았다. 가을걷이 끝난 참깨밭 에서 녀석들이 저녁식사를 할 요량인가보았다. 오종쫑 뛰어 다니는 녀석들 중 어떤 놈은 창 앞 감나무 밑에서 다가왔다. 어허, 쑥씨네. 나는 혼자 말 을 했다. 뺨이 까맣고 눈썹선이 하얀 게 영락없이 겨울 철새인 쑥새였다. 뭐라구요,라고 아내가 냉큼 반문했다. 쑥새가 왔다구. 나는 행여 어린 쑥 새들이 놀라 달아날까봐 소리를 한껏 낮추어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이라 도 올라가 볼게.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시베리아나 캄차카에서 여름 을 보냈을 녀석들이 벌써 여기 와 있는 걸 보면 이제 곧 겨울이 본격적으 로 들이닥칠 모양이었다. 부엉이, 큰고니, 쇠기러기, 두루미, 황새도 오겠 지, 그렇게 크고 사나운 새들 틈에 끼여 작은 쑥새들이 캄차카에서 예까 지, 수천리 머나먼 여정을 날아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작은 철새들 은 이동할 때 주로 밤시간만 이용한대요,라고 말한 건 여름에 여기 와서 하룻밤 자고 간 막둥이였다. 큰 철새들이 떼지어 낮에 이동하니까 작으 꼬 마철새들은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낮엔 숲이나 밭에 내려앉아 먹이를 구하 고 큰 새들이 잠든 한밤중 밤새워 고단한 여행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 막 둥이는 그러면 쑥새나 콩새같이 꼬마철새인 게로구나, 밤에만 이동하는 걸 보면, 나는 웃었고 막둥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막둥이는 곧잘 제 어미가 잠든 한밤중에 살짝 집을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곤 했다. 몽유병 에 걸린애 같아요, 글세. 아내는 한뭉을 쉬었다. 이제 고등학교 일학년을 거의 다 보낸 막둥이가 자율학습까지 끝내고 집에 돌아오는 시각은 보통 열시 반쯤이었다. 잠은 그럼 언제 자냐고 들이댄 내 질문은 우문이었다. 학교에서 자지요,라고 아내는 말했다. 수업시간에도 자고 자율학습시간에 도 자고 버스 속에서도 잔다는 것이다. 쑥새란 놈들은 잠도 자지 않고 캄 차카에서 예까지 날아온 그 고통스런 여정을 기억하기나 할까. 무리져 나 는 수많은 큰새들한테 잡아먹히지 않을까 불안함에 떨며 낯선 땅 낯선 하 늘 길 없는 길을 내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달려온 쑥새들의 분주한 저녁식사를 나는 망연히 내다보았다. 놀빛이 암갈색으로 잦아들었다. 나는 밥솥의 플러그를 꽂았다. 놀빛이 잦아들면 이내 어둠, 쑥새들이 참깨밭을 떠날 때쯤 아마 쌀이 끓어 밥이 될 터였다. 여기 오래 있으면 적적해서 괜한 사람도 골병 들겠어요,라고 아내가 말한 것도 여름이었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이 절상의 저물녘을 여기서 아내가 만났다면, 골병이 아 니라 임종이라는 낱말을 아내는 떠올리지 않았을까. 어둠이 굴암산 깊은 골에서부터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산기슭으로 내려왔다. 쑥새들이 굴암 산 쪽으로 날아가고, 곧 밥솥의 밥이 끓는 소리가 났다. 글쓰기를 중단하 고 이 외딴집에서 간 지도 어언 십 개월이 지나 있었다. 얼마나 적막한, 절상의 붐.여름.가을이었던가. 돌아보면 막둥이보다 더 산만하게, 쑥새들 이 지나쳐온 밤으로의 여로보다 더 불안하게, 뭔가에 등 떼밀려 바람 거슬 러 달려온, 절룩이는 ,분열의, 겨울철새, 한반중, 고단한 여로와도 같은 내 반생의 시간, 그 잔인한 관성. 나도 여보, 방 좀 바꿔주구려. 아내에게 이윽고 혼자말로 나는 말했다. 3 세상에, 이게 뭔 일이라냐,라고 어머니는 소리쳤다. 어머니는 내가 열네 살 때까지 살았던 고향집 아랫방에 앉아 있었다. 아니 앉아 있다기보다 잠 자리에 들었다가 뭔가에 놀라서 소스라쳐 상체를 일으켜 세운 형국이었다. 이부자리 위의 어머니는 붉은 내의 속치마 바람에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사시나무 떨 듯 했다. 하이코오, 천지개벽, 빛살 때문이었다. 이상도 하 지, 멀리 둘러보면 하늘도 땅도 캄캄한 한밤중인데, 사방에서 벽과 천장을 투사한 빛다발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검버선이 잔 뜩 핀 마른 목에 툭 불겨져나온 핏줄이 이내 지글지글 끓어오를 것 같았 다. 어머니, 이불을 뒤집어쓰세요. 나는 소리치다가 잠을 깼다. 동창 앞에 앉아서 책을 읽던 중 잠이 들었던가보았다. 서탁 위에 펼쳐놓인 책장 위로 침 묻은 내 입술자국이 일부 찍혀 있었다. 그것 참 묘한 꿈도 다 있구나. 밤이 깊었지만 창 밖 굴암산의 숲은 푸르스름한 양수에 감싸인 듯 보였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이제 꼭 이십 년. 굴암산 너머 어디쯤, 머지않은 산자락 한 굽이에 묻힌 어머니의 주검은 지금 희디흰 백 골로 풍화했을 터. 백골인 어머니가 한밤중 내게 무슨 주술을 보내는 것일 까. 나는 읽다 만 책을 당겨들었다. 불교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었는데 진 도는 아직 석가세존이 태어나기 천 여년 전쯤에 머물러 있었다. 아리안족 이 인도에 침입해 정착하고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힘을 신경화해서 법률신 과 창조신 등 다신교를 성립시킨 건 대략 기원전 천이백년경에서 기원전 팔백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그 책은 말하고 있었다. 불교는 물론 힌두 신 앙의 원형적 관념들이 담긴 브라흐마나 문헌이 성립된 건 기원전 천년에서 육백년 사이. 우주의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원리 <브라흐만>과 여기 실존으 로 놓인나, <아트만>의 합일을 원했던, 그리하여 무거운 고통의 제의를 통 해 깃털보다 가벼운 육신을 꿈꾸었던 고대 인도인들이 가졌던 사유 체계 속에서도 제일 고통스러웠던 개념의 하나는 윤회였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를 통해 삶의 유한성을 극복해야만 윤회의 사 슬은 끊어지고 영원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세존이 태어난 것보다 적어도 천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그 옛날에 이미 인도인들 세계관 속에 굳게 자리잡았던 이런 식의 소박한 윤회설이 나를 찍어눌렀다. 브라 흐만 문헌에 기록되었다는 오화설을 나는 다시 읽었다. 사람은 사후에 달 로 간다 했다. 달에서 비를 통해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땅으로 내려와 곡 식과 채소의 뿌리를 통해 음식물이 되며, 음식물은 정자를 통해 최후의 모 태로 들어가 마침내 끝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책장을 덮었다. 달은 중천에 떠 있었다. 사람은 사후에 화장되어 달로 가고...라고, 나는 덮은 책장 안쪽의 한 구절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람은 사후에 화장되 어 달로 가고, 가고, 가고, 나는 갑자기, 막둥이가 보고 싶어졌다. 그것은 뜻밖의 그리움이었다. 사람은 사후에 화장되어 달로 가고, 백골의 어머니 는 달로가고... 어머니가 보고 싶은데, 어머니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고 등학교 다니는, 팔팔한 힘을 부릴 데 없어 달도 없는 한밤에 몽유병자처럼 곧잘 돌아다닌다는 막둥이가 보고 싶었다. 시계는 막 자정을 넘기고 있었 다. 찻길이 붐비지 않을 터이니 곧 출발하면 한 시간 이내 세검정 집에 닿 을 것이다. 일주일 만의 귀가였다. 나는 설거지통 옆에 쌓아둔 빈 음식그 릇들을 서둘러 가방에 쑤셔넣었다. 일주일 전에 가지고 온 반찬은 겨우 김 치 몇쪽이 남았을 뿐이다. 도대체 당신 뭣 먹고 살아요,라고 아내는 곧잘 수화기 저쪽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밥 해서 김치하고 먹지. 내가 대답하면 세상에, 하고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꼴이우. 당신이 마 누라가 없수, 돈이 없수, 집이 없수? 젊어 이래 그만큼 열심히 일해왔으면 이제 편히 좀 발 뻗고 쉬어도 좋은 나이가 쉰 살이련만, 그 궁벽진 산속 오두막에서 쌀 씻고 빨래하고, 김치 한가지에 삼세 끼 먹는 둥 마는 둥,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그렇지, 왜 당신이 벌받듯 살아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수. 작가가 무슨 형벌이우? 작가가 특별히 형벌로서의 삶은 아니지 만, 형벌로서의 삶을 면제 받을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형벌은 삶 자체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는 무게만큼의 형벌을 지고 산다는 것 나는 작가 노릇을 그만둔 뒤에 더 선연히 깨달았다. 작가이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므로, 그 형벌의 연원을 물 맑은 눈빛으 로 보고자 나는 여기 있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쓸쓸한 삶의 본원에 나날이 다가가 이윽고 참된 아트만의 정체를 꿰뚫고자 하는, 결국 아무것도 꿰뚫지 못할망정, 꿰뚫고 싶은 그리움을 따라가는 쓸쓸한 희열, 그리고 도정이었다. 내가 작가 노릇을 가만두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궁벽 진 굴암산 산자락 오두막에 흘러와, 저기 저 캄차카에서 날아온 쑥새 콩새 들과 아침저녁 마주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지금껏 내가 끝없이 분열하 며 피 흘리는 것이 작가라는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화댁(火宅)의 세상에서 작가는 불타는 어린애들을 구하는 <흰 소가 끄는 수레>의 그 장자인가, 불구덩이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몽매한 어린 아이인가. 한때 나를 괴롭혔던 이런 화두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작가라 는 이름의 허상을 치우고 보며 분명히 나는 한낱 불타는 아비지옥의 어린 아이 같은 것이정한 이치인바, 작가라는 이름은 고(苦)의 소멸에 결단코 기여할 수 없고, 이치가 그러하니 작가라는 이름으로 왜장치는 언설(言說) 들이 정견(定見), 정사유, 정어(正語), 정업(正業)이지 못하면, 참된 의미 에서 정명(正命)일 수도, 정정진(政情進)일 수도, 정념(正念)일 수도, 정 정(正定)일 수도 없었다. 굴암산 궁벽진 환경이 홀로 사는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작가라는 이름의 우상에 갇혀 산 나를 풀어놔라 하는 것이지만, 풀어 져 자유롭게 흘러갈 그리운 그곳이 어디냐 하는 점은 오리무중이었다. 궁 벽진 곳에 있어도 마음이 궁벽지지 못하고 우상을 깨고자 해도 다른 우상 들이 내 앞에서 칼 물고 널뛰기하는, 관성은 상기도 푸르게 살아남았으되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거리 까마득히 멀어 나는 아직 행복하지 못했다. 밤새들이 꾹 꾹 꾸르르 울고 있었다. 나는 세탁할 옷을 담은 가방과 빈 음 식통을 잔뜩 담은 가방을 한 어깨에 메고 서서 현관문을 잠갔다. 내가 다 시 돌아올 때까지 빈 오두막은 어쩌다 바람, 어쩌다 겨울새, 어쩌다 집 없 는 들고양이나 지나쳐 갈 것이었다. 굴암산엔 안개가 흘렀고, 달은 이제 막 한 무리의 구름떼를 비켜나가고 있는 중이었으며, 바람은 차가웠다. 어 디 골 깊은 산에 들어가 엎디어 있으시우. 만신인 강신무 김 여사의 말이 불현 듯 떠올랐다. 꼭 감옥에 갇힌 형국이구려. 사주 짚을 것도 없이 다짜 고짜 김 여사가 말할 때, 나는 이미 이곳의 오두막을 구해놓은 뒤였다. 글 쓰기를 중단하기 보름쯤 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고통받는 분열의 단초가 작가라는 이름 때문인지 알았고, 그래서 비록 산속 오두막 에 가족과 생이별해 살망정 이곳이 영원한 은둔자의 처소일 수 없으며, 다 만 새로운 길을 떠나기 위한 부화지(孵化地)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김 여사는 덧붙여 이르기를 산속에 엎디어 있되, 스스로 힘써 거기를 박차고 나오려 하지 말고 스스로 좋아서 거기 있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운세의 형 틀이 풀린다고 했다. 나는 물론 그 설법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쓰기를 막 중단하려던 그 무렵만 해도 내가 여전히 작가라는 이름의, 저 무겁고 고단한 갑옷을 벗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상의 갑옷을. 그러나 겨 울이 가고 굴암산 여기저기 야생화들이 종환(腫患)처럼 부풀어올라 천지사 방 터지는 봄이 또 가고, ㅅ이 한 웅어리로 깊어지는 여름이 왔을 때, 나 는 깨달았다. 내가 형틀로 짐지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작가라는 이름의 갑옷 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구좌라는 것을, 많은 동료, 혹은 후배 작가들이 깃 털까지 꽂은 멋진 투구에 우상의 갑옷 떨쳐입고서 마상에 올라앉은 광채도 눈 시린 광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그 광장으로 나아가려 할 때 보 지 못했던 것들을 나는 새삼 보았다. 어떤 이는 참여의 삼지창을 들고, 어 떤 이는 순수의 환도를 들고, 또 어떤 이는 실존의, 또 어떤 이는 역사의 장검을 들고, 그러나 어떤 이는 짐짓 창을 등뒤로 감추기도 하고 말을 감 추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거의 운명처럼, 많은 이들이 각개약진(各個躍進) 의 보폭으로 우상의 광휘를 향해 몰려가는 그 선연한 형상에 나는 전율했 다. 그것은 내가 작가로 살았던 스물 몇해의 잔인한 자화상이었다. 그런 자화상을 선연히 만나는 저물녘엔 두 무릎 세워 안고 밤새 소리 죽여 운 적도 있었다. 소리 죽여 울면서, 더 깊이, 더 어둡게 머리를 박았다. 어머 니,라고 나는 가끔 소리쳐 불렀다. 내가 그리운 곳은 광장이 아니라, 부드 러운 양수에 둘러싸여 온몸을 순행 원리에 따라 구부러지는 쪽으로 구부리 고, 배꼽으로 숨쉬며, 눈은 닫고 귀는 여는, 어머니, 옳다가도 그르다고도 말하지 않는 무기(無記)의 자궁 속, 깊고 깊은 골방, 어머니는 내가 머물 러 있는 오두막에서 산등성이 두엇 넘은 곳에 있었다. 백골로 해체됐나니 내 한 몸 구부려 뉠 골방도 이제 없으되, 그러나 나는 자주 숲 사이, 길 없는 길을 넘어 어머니에게 가곤 했다. 돌에 걸려 넘어지고 가시나무 가지 에 생살이 찢기면서 자궁 속보다 더 어두운 한밤중 산을 넘어가다보면 내 가 영락없이 무엇인가에 씌운 몽유병자였다. 몽유병에 걸린 애 같아요, 글 세. 막둥이는 산 너머 골 깊은 곳에 제 어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집을 등 지고 밤이면 어디 떠돌다 오는 것일까. 나는 오두막 앞을 출발해 산자락을 따라 비포장 도로 좁은 길로 차를 몰았다. 곧 마을이 다가왔다. 컹컹컹컹, 마을 집집마다에서 차소리에 개들이 짖기 시작했다. 백미러를 통해 오두막 쪽을 일별했으나 오두막은 이미 푸른 달빛의 양수에 둘러싸여 어슴푸레한 윤곽뿐이었다. 사람은 사후에 화장되어 달로 가고,라고 나는 다시 한번 중 얼거렸다. 달빛이 나는 사로잡았다. 달에서 비(雨)로, 비에서 풍요로운 곡 식과 야채들로, 정자로 내 상상 속의 이미지는 재빨리 전이되었다. 씨앗을 싹트게 하고 곡식과 초목을 키우는, 정자의 힘찬 율동과 내쏘임을 조율하 는 생명의 시원(始原)인, 그리고 마침내 가장 어둡고 가장 따뜻하고 가장 깊은 골방 속에 똬리 틀게 했다가, 시간의 제의(祭儀)를 거쳐, 생살 찢어, 세상 속으로 그 생명을 내던지고 마는 달이, 달이 굴암산 정수리로 가고 있었다. 굳이 인도인들이 아니라도 더 많은 대륙의, 더 옛날의 수많은 사 람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아기를 배게 하는 게 달이라고 믿었던 근거를 나 는 생각했다. 달이 없다면, 저 푸르스름한, 차갑고도 따뜻한 양수의 섬광 이 없다면 북남미 인디언들이 믿었듯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믿었듯이, 중앙아시아 톈사 산맥아래의 원시 종족이 믿었듯이, 그린란드의 고대인들 이 믿었듯이, 서유럽의 켈트족이 믿었듯이, 과연 달이 없다면, 과연 저 푸 르스름한, 차갑고도 따뜻한 양수의 섬광이 없다면, 짐승들은 새끼를 배지 못하고 어머니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인가. 나는 자동차의 악셀을 나 도 모르게 더욱 깊이 밟았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개천을 따라 활처럼 휘어 진 포장도로였다. 달빛이 길 좌우에 선 버드나무 실가지를 타고 포장도로 에 질펀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해체된, 옥양목처럼 새하얀 백골 이 달빛을 받아 하나하나 복원되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전율했다. 사방을 뚫고 들어와 어머니를 에워쌌던 꿈속의 그 광채는 그럼 달빛이었을까 하 고, 나는 좀 전에 오두막에서 꾸었던 짧은 꿈의 파편들을 떠올렸다. 그리 고 그 사이로 창 때문에요, 아내의 말이 무의식적으로 끼여들었다. 용인 톨게이트가 다가왔다. 톨게이트 앞은 삼거리였다. 직진하면 어머니 계신 묘원의 진입로와 만날 것이고 좌회전하면 서루로 가는 고속도로였다. 창이 너무 넓으면 애들이 산만해진대요,라고 아내가 말할 때, 어머니는 햇빛이 었는지 달빛이었는지 빛다발에 싸여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내의 말과 어머니의 주술 사이에서 망설였다. 그리고 곧 아내의 말과 어 머니가 꿈으로 전하는 주술이 어떤 지점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걸 보았다. 나는 그러나 핸들을 왼편으로 감았다. 막둥이의 방은 정남향의 우리 집의 이층 동남간에 위치해 있었다. 북한산 본간(本幹)에서 빠져나온 북악의 아 기자기한 산세를 한눈에 조망하려고 남향과 동향을 이어 드넓은 코너 창을 뚫어놨으니 그 명도(明度)로 치면야 문 밖과 다름없었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햇빛이 들었고, 햇빛은 시시때때 향(向)과 각(角)을 바꾸면서 침 대 아래 책상 밑까지 닿았다. 볕 좋은 한낮 겨울에도 어쩌다 막둥이 방을 들여다보면 커튼이 빈틈없이 쳐져 있었던 것을 나는 비로소 상기했다. 과 연 숨을 데가 없는 방이었다. 어찌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가. 물론 북동방 (北東方)에 위치한 큰애 방이라고 해서 창이 없는 건 아니지만 동창(東窓) 뿐이니 훨씬 더 안정감이 있었다. 여름에 입대한 큰애가 제대하기까진 앞 으로 이 년여, 오직 입시에 매달려야 할 고등학교 이삼학년 시기를 앞둔 막둥이 방을 바꿔주기엔 시간적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고속도로는 휑하니 열려 있었다. 차의 속력이 금방 백에서 백이십, 백사십 킬로미터까지 올라 갔다. 이런 속력이라면 세검정 집까지 한시 반까진 닿을 수 있었다. 아내 는 아마 잠들었을 것이다. 오늘 때맞추어 야행을 할 계획이 아니라면 막둥 이도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각이었다. 심야의 고속도로에 차들은 흐르듯 달 려갔다. 글쓰기를 그만둔 지난해 연말부터, 아니 글쓰기에 대한 극도의 회 의에 싸여 있던 그 이전부터 내 내면의 분열과 내적 출혈을 짊어져가는 데 급급해 막둥이도, 아내도 깊이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불현 듯 생각이 미쳤다. 문학합네, 작가입네 하는 걸 가족과 이웃에게 이기적으로 굴어도 되는 면죄부처럼 여긴 것이 어디 한두 번 일이었을까마는, 돌아보 니 최근 일이 년 동안은 그것이 극에 달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보다 훨씬 초췌해진 아내의 얼굴에 드린 그림자와 전보다 훨씬 말수가 적어진 막둥이의 우울한 표정들을 나는 비로소 떠올렸다.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짊 어진 번민 탓이려니 여겼던 건 잘못이었다. 뭔지, 그 사이 막둥이가 크게 어긋난 건 아닐까. 막둥이는 과연 달이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어오른 새벽 한시 이십분, 잠을 자고 있진 않았다. 세검정 주택가 비탈길을 지나 우리 집 외관이 한눈에 올려다보이는 골목 어귀로 차의 머리를 꽉 들이밀었을 때, 나는 검은 그림자가 하나가 이층 베란다에서부터 아래층 뜰로, 베란다 에 닿을 듯이 솟아 올라간 모과나무 메마른 줄기를 타고 거의 곡예사처럼 미끄러져 내리는 걸 보았다. 창마다 모두 불이 꺼져 있었지만 투명한 달빛 때문에 나는 문제의 그림자가 푸르른 열일곱 살 막둥이라는 걸 단번에 알 아차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차의 시동과 라이트를 껐다. 막둥이가 이내 담 장 위로 나타났다. 건물의 위치가 골목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밖에서 보는 담장은 축대를 겸해 거의 삼사 미터나 되었다. 그러나 막둥이는 아주 익숙 한 솜씨로 담장 밖의 전신주에 상반신의 일부를 의지하여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백팔십의 키에 육십오 킬로그램. 군살 하나 없는 균형잡힌 몸매와 반듯하게 벌어진 어깨, 쭉 찢어져 올라간 눈과 깨끗한 선으로 마무리 된 콧날. 그리고 아침 햇빛처럼 어딘지 모르게 힘이 넘치는 야성의 분위기를 막둥이는 갖고 있었다. 검은 진바지에 딱 붙는 검은 재킷과 검은 운동모를 막둥이는 쓰고 있었다. 담장을 타고 내리는 몸놀림이 너무 유연하고 너무 민첩하고 너무 가벼워 막둥이는 아름다워 보였다. 나는 숨을 죽였다. 대문 앞엔 아내가 사용하는 아반테 승용차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막둥이는 당연히 성큼성큼 걸어서 내 차 앞으로 다가오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아반테 승용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부르릉, 아반 테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 그리고 야생동물의 눈과도 같은 미등의 불이 켜 지고, 곧 후진 기어 신호등이 들어왔다. 아내는 막둥이의 야행성에 대해서 만 말했지 자동차에 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었다. 십 몇년 전 운전면허를 딸 때, 차의 시동만 걸면 번번이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이 충혈되는 듯해 서, 몇차례나 주행에 실패하곤 했던 기억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집은 막다른 집이었다. 그제야 막둥이는 불을 끄고 서 있는 내 차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런 계기반도 없이 어둡고 광활 한 습지를, 어느 땐 여우처럼 날렵하게 어느 땐 뱀처럼 온몸으로 기면서, 마치 우주 저쪽에서 오는 미세한 신호를 포착하려는 듯이 눈, 귀, 입, 감 각의 안테나 있는 대로 열고, 그러나 사실의 잔인한 장부를 결코 버리는 일 없이, 작은 징후들에 의지해 출구를 찾아나가야 하는 작가의 길에서, 이제 온갖 것 회한과 회의에 가득 차 스스로 자원해 아웃사이더의 골방에 몸을 뉘려 하고 있는 쉰 살의 아버지와, 광대무변한 인생을 향해 푸르른 말처럼, 속도감과 긴장감과 순결하고 정직한 직진의 감수성으로, 그것들을 무기로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나갈 열일곱 살의 아들이, 각각 다른 차의 어 둠 속에 싸여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달빛이 차의 표피에서 숨가쁜 미끄럼을 타고 있었다. 4 나는 조포(粗暴)한 질주 때문에 물집투성이의 천만(千萬)삶들이 공간과 시간의 가로 세로 문양을 한 덩어리로 뭉개에 들고 나되, 결코 들수도, 결 코 날 수도 없는 불가사리 같은 수도 서울의 양지바른 노른자위 땅에 단단 하고 실팍한, 창이 넓은 집 하나를 오래 전부터 짓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열다섯에 가출해 영등포역 지저분한 대합실에서 나흘 밤 닷새의 한낮을 굶 주리며 보내다가 다시 귀향 열차를 도둑으로 타고 내려갈 때, 이미 내 자 신과 암뭄적으로 맺은 약속이었다. 나는 열다섯 되던 그해 봄에 이미 내 삶이, 어디에서 무엇으로 살든 끝없는 부랑(浮浪)의 연속선상에 놓이게 되 리라는 걸 거의 동물적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하거나 외로운 사실적 의미에서의 내 처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원형적인 그 무엇 때문에 내 삶의 관성이 부랑의 어둔 길에 놓여지리라고 나는 예감했 다. 소심하고 약해빠져서 이립(而立) 전에 각혈하고 죽을 것 같은 껍데기 를 쓰고 있었지만, 그것은 교활한 짐승이 위기 탈출을 위해 짐짓 죽은 척 하는 것일 뿐, 내 핏줄 속엔, 내 갈비뼈 안쪽엔 스스로 데어 길길이 날뛰 지 않으면 안 될 잔인한 불길이 화냥기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살인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십대 때 두 번 수면제 다량 복용으로 위 세 척을 했고 대학 때는 도루코 면도날로 대동맥을 내리쳤다. 젊은 날의 나는 언제나 살의 때문에 전신이 풍뎅이모양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살의를 멈출 수 있기를 때때로 너무도 절박하게 꿈꾸었으며, 그럴 때면 내가 설계해 내 손으로 지을 창 넓고, 튼튼한 집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 가, 집을 지어야지, 언젠가, 내 부랑의, 저 잔인한 살의를 영원히 잠재우 기 위한. 부랑은 끝이 없었다. 아이가 셋이나 내 정충으로 태어나고, 유명 작가가 되고, 인세 수입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도 부랑은 내가 지닌 살의 처럼, 말미잘처럼 내 늑골 사이에 흡착해 있었다. 사십삼 년이나 그 관성 은 계속 질주됐다. 그리고 마침내 마흔네 살 되던 해 봄, 나는 꿈꾸고 꿈 꾸어온 대로 세검정 남향받이 전망 좋은 땅에 말뚝을 탁 박았다. 창을 넓 게 해주세요. 나는 직업설계사에게 말했다. 집이란 벽이 필요한 거외다. 한 점 걸 데는 남겨두셔야 하지 않겠소? 설계사는 웃었다. 상관없다고 나 는 말했다. 어떤 방 어떤 공간도 햇빛이 쫙 들도록 해야 된다고, 밝고 투 명해야 된다고 나는 몇번씩l이나 다짐을 두었다. 마흔세 해 동안을 흘러다 닌 저 음습한 어둔 방들이 있었으니 내가 내 삶의 제단에 바칠 걸 다 바쳤 다고 나는 생각했다. 집 짓는 데는 반년이 걸렸다. 장마철이면 매일매일 한밤중 아내 몰래 내 집을 짓는 그 현장으로 갔다. 내 집터가, 내 집의 골 조가 캄캄한 한밤중 저 혼자 비에 맞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 다. 집터만한 우산이 있으면, 하고 나는 바랐다. 북향의 부엌까지도 각 (角)을 주어 동쪽에서 햇빛이 깊숙이 들어오게 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환호작약했다. 부랑이란 말로 요약되는 내 영혼의 음습한 자학과 비극 지 향도 이제 끝장이었다. 무엇보다 내 정자의 씨를 아내의 자궁에 박아 세상 에 나오게 된 큰애와 딸과 막둥이가 성장기를 보내게 될 집이었다. 너희들 은 밝게 살아야 돼. 너희들은 절대로 자신에게 살의를 품어선 안 돼. 나는 아이들 방에 벽돌이 쌓여 올라가는 거 보면서 속으로 말하고 또 말했다. 너희들은 아비가 살았던 살의의 골방에 접근도 해선 안 된다. 햇빛 같아야 된다.라고. 떠돌면 죽음이다,라고. 그렇게... 나는 조포한 질주 때문에 물 집투성이의 천만 삶들이 들고 나되, 결코 들 수도, 결코 날 수도 없는 서 울 양지바른 땅에 실팍하고 창 넓은 집 하나를 지어 아내와 세 아이에게 바쳤다. 그것은 내 부랑과 삶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살의를 끝장내겠다는 선언적 의미 이외에 아이들에 대한 내 방식대로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애야. 막둥아, 애비는 후회해. 글쓰기에 대한 나의 신념 체계가 조금씩, 그리고 급격히 흔들이면서부 터, 내가 쓴 소설들의 햇빛 밝은 명징한 구조들을 스스로 들여다보게 될 때부터 나는 자주 몸서리를 쳤다. 부랑의 양식을 삶의 전범으로 들고 선 나의 실용적 무기는 정직성이었다. 나는 내가, 내 문장들이 깊고 드넓은 진실의 심해에 이르지 못할망정, 최소한 나의 오욕 덩어리 내장까지도, 삶 아서 쟁반에 담아낸 게처럼, 여지없이 찢어발겨 햇빛 아래 내놓을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주 오랫동안. 감각의 안테나는 언제나 기름칠이 반 지르르했고 감수성의 칼날은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나는 부랑의 양식과 정직성의 환도를 들고 세상 속으로 쾌속 항진했다. 사십대 초반에 이를 때 까지만 해도 내겐 특별하고 본질적인 회의가 없었다. 벌거벗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부끄럽지 않았고, 가끔 황홀한 오르가슴에 젖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가슴 한켠이 썰물을 만나 메마른 모래밭 되어 수면 위로 부상하는걸 느끼게 됐을 째쯤, 나는 천천히 내가 지어놓은 다양한 소설의 집들을 들여 다보았다. 그것은 방마다 창이 ㅇ은 남향집이었다. 마치 창을 내가 위하 여, 햇빛을 내실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여지껏 젊은 목숨을 다 바쳐 집을 지어온 것 같았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모든 게 명징하고 투명하게 보 였다. 독자들이 삶의 관성을 잊고 발바닥 물집들을 하나씩 뜯어내려면 어 디 다른 처소, 예컨대 스탠드가 있을 뿐인 골방 같은, 또 다른 별채를 얻 어야 할 것이었다. 글쓰기를 멈추고부터는 더욱 더 뚜렷이 그 명징한 방들 이 보였다. 간결한 문체, 칼날 같은 감수성, 이라고 어떤 평론가는 내 소 설에 재해 썼다, 그 말에 저주 있을진저, 왜 나는 이 순간까지도 so 소설 의 집 속에 때로 천진한, 때로 습한, 때로 모든 사물이 녹아 섞이는 어두 운 굴방을 숨겨두지 못하는가. 이것은 단지 글쓰기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본원이다, 라고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내가 가진 겉구조의 사유 체계엔 가짜 대답들이 가지런히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그러나 그 대답들이 가짜라 는 걸 나는 이제 너무 확고하게 알고 있었다. 대답은 나의 내장 어느 은밀 한, 습하고 어두운 골방에 겨울 뱀처럼 똬리 틀고 있을 터였다. 이놈아, 햇빛 아래 너도 나오거라. 나는 소리쳤다. 방마다 창을 내려는 것은 원심 력의 상지이며, 그것은 결국 골방 안으로 들려는, 운명적 구심력에 대한 공포감의 반작용이라는 걸 깨달은 것은 봄이었다. 막둥아. 창들을 별돌로 막아버릴까. 너를 참으로 갚이 숨쉬게 할 수 있다면. 어둠 속으로의 불안한 질주를 그만두게 할 수 있다면, 달마다 부풀어오를 대로 올랐다가 때가 되면 짚불 처럼 꺼지고 마는 너의 월주기를 가지런히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네가 월 경을 할 수 있다면, 심리학자는 말했다. 집 안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자개그릇의 이미지. ... 골방. 야생화들이 굴암산 이곳 저곳에서 종환처럼 부풀어올랐다가 천사지사방 터지는, 그 봄에, 나는 부랑이라는 이름의 전범을 놓아버렸다. 정직성은 부식해 한낱 나뭇가지만도 못한 칼일 뿐이었다. 그것은 외부로 외부로 창 을 내려는 위장된 원심력은 기반으로 삼은 허깨비들. 이제 어둡고 습한 굴 을 따라, 행여 발을 헛짚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까봐 전긴에 잘 박아 세우고 걸어서, 명징한 것들의 다른 이름, 햇빛, 초록, 창, 그런 것 들을 제 마음대로 차용하여 나를 허깨비로 만들고 나의 생살을 찢어온, 저 교활한 음모자의 낯짝을 찾아내야 할 차례였다. 나는 골방이 두려운가, 나 는 골방이 그리운가. 두렵고, 그리운, 내 골방 속에 과연 누가, 어떤 날을 풀잎보다 여린, 어떤 날은 짐승보다 야만적인, 또 어떤 날은 삼줄보다 끈 질긴 얼굴로 숨어 있는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나와 아늬 골방을 극 단의 분열증으로 관계맺게 했는가. 아반테. 마등은 짐승의 눈을 닮았지. 막둥아. 애야. 밤마다 너는 어디로 가느냐. 5 그냥 아무데나 가요, 라고 막둥이는 대답했다. 아반테는 논산에서 강경 으로 이어지는 들녘 한가운데를 고속 질주하고 있었다. 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는지, 들녘은 어슴푸레했다. 아무데나 가다니, 우리 동네 말이냐. 막둥이가 피식 웃었다. 운전대를 잡은 막둥이의 프로필은 조상 같았다. 차 를 몰고, 아주 먼데까지도 가는 모양이구나. 신촌이나 동숭동, 그런 곳에 나가보는 거니. 언젠가. 막둥이가 대답했다. 강을 따라 팔당까지 갔다온 적도 있어요. 나는 놀라서 아무 대꾸도 하니 않았다. 열일곱 살의 무면허 운전자가 무 제한의 속도에 몸을 맡겨놓고 내다보는 심야의 강변 풍경은 어땠을까. 길 이 좋은 곳에선 악샐을 끝까지 다 밟아버려요. 시속 백오십 킬로미터를 넘 으니까 차의 미소 뒤에 숨겨놓은 교활한 함정 같은 걸 나는 보았다. 적개 심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막둥이는 암튼 나를 해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 것은 내가 아반테의 운전석 옆자리에 옮겨타면서, 나의 놀람을 애써 감추 고, 네가 운전을 할 수 있는 줄을 정말 몰랐구나, 라고 첫마디를 건넸던 세검정 집 골목 어귀에서부터 그랬다. 어디 아들이 운전하는 차 좀 타보 자.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막둥이는 거의 발작하듯, 그리고 익숙하게 운 전해 집 앞에서 논산을 지나 예가지 오는 데 불과 두 시간이 조금 더 걸렸 을 뿐이었다. 아까도 봤다. 앞대가리 부르르 떨리는 거. 한참만에 나는 말했다. 시속 백 킬로가 넘어 아반테의 앞머리가 부르르르 떨릴 때마다 막둥이의 얼굴엔 번번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 뒤엔 당신은 떨럴걸. 하는 경멸 과 어차피 예까지 오자 한 건 당신이니까. 하는 반발이 뒤섞여 있었다. 도 대체 언제부터 그와 나는 이처럼 어긋나기 시작했을까. 저 앞에서 좌회전 해라, 라고 나는 말했다. 강경읍내를 앞두고 차는 왼쪽으로 돌았다. 고향 집은 그곳에서부터 장장 팔 킬로, 광할한 논강벌판을 서남쪽으로 휘돌아져 흐르는 둑길 끝에 있었다. 금강 지천이 둑길을 따라 흘렀다. 때마침 달이 구름 밖으로 일부분 나왔기 때문에 실뱀처럼 구불구불 지천이 수면은 아주 창백해 보였다. 막둥이는 중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유난히 내게 씨름이나 팔 씨름 같은, 힘겨루기를 졸랐다. 나한테 지고 난 녀석의 눈빛엔 자주 범상 하지 않은 이상한 광채가 번뜩였다. 쟤가요, 글쎄. 아내는 어느 날 말했 다. 당신한테 팔씨름에 지고 난 뒤엔 뜰로 나가서 팔굽혀펴기를 백 번씩이 나 한 대요. 딴 건 유난하지 않은 애가 당신을 힘으로 이기는 것엔 왜 그 렇게 집념이 강하데요? 그는 먹성이 좋았고, 먹성이 좋은 만큼 발육도 좋 아서 팔씨름만은 중학교 일학년 겨울방학 때 결국 나는 꺾었다. 안간힘을 쓰던 내 팔을 거실 바닥에 단호히 자빠뜨리고 나서 나의 눈을 똑바로 쏘아 보던 그의 야성적으로 찢어져 올라간 눈매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하이코오 인석. 인제 다 컸네. 어떠냐. 애비를 이기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 냐. 내 말에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올라가 버렸다. 기쁜 내갯은 아니었 다. 그렇다고 패배한 나는 연민으로 보는, 그런 표절은 더더욱 아니었다. 한 순간 눈빛에 번득이던 어떤 강한 내쏘임. 그리고 이층을 향해 뚜벅뚜벅 올라가던 그의 뒷모습에서 나는 뜻밖에도 선험적이라고나 할까, 에덴을 등 지고 걸어나가는 카인의 그것과 같은, 피어린 고절의 이미지를 보았다. 하 지만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열셋의 소년이었다. 나는 곧 그 이미지를 잊어 버렸고, 그쯤부터 작가로서 내 갈등은 나날이 깊어졌으며, 그는 그대로 자 율학습이다 과외다 새벽에 나가고 밤늦게 돌아왔으므로, 피차 깊이 만날 일 없이 관계는 일상화되었다. 아내의 표정과 무심코 내던졌다가 다시 주 워담는 몇마디 말 때문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는 그 예민한 시기의 그가 자못 갈팡질팡 방황하는가보다 여긴 적은 더러 있었지만, 사춘기 아 닌가, 나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지냈다. 저구나 그는 내가 기억하는 어 린 시절에 줄곧 우등할 만큼 머리도 좋앗도, 학교에서 큰 말썽을 저질러 오라 가라 한 적도 없었다. 때때로 남달리 대담한 구석이 있는 줄은 알았 지만 이제 겨우 열일곱의 그가 시속 백오십 킬로로 고속도로를 질주해와 아주 오랜만의, 때아닌 내 귀향길에 운전자로서 요철이 심했지만 그는 계 속해서 악샐을 힘있게 밟았다. 오줌 좀 싸고 가자, 얘야. 차가 섰고, 차문을 열고 나오다가 나 또한 멈칫 섰다. 구름에 상반신이 걸쳐져 있던 만월이 그 순간 완전히 제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리하여 먼데 가까운 데 풍경들은 명도를 한껏 높여 함 뼘씩 다가들었고, 그가 차의 엔 진을 꺼버리고 나자 갑작스런 적요, 더불어 구부러진 둑길과 광활한 들판 과 잠자는 잡풀과 뱀 같은 개천이, 수은을 입힌 듯 문득 두 뼘씩 세 뼘씩 다가와, 금방 둑길이 들판 되고, 들판이 잡풀 되고, 잡풀이 뱀되고, 둑길 들판 잡풀 뱀. 그리고 엎드린 들 가운데 마을들까지, 구분 없이 무한 경계 로 섞여 흐르는 것에 나는 떨었다. 차 밖으로 나와 달빛 아래 서는 일순 간, 내 전신이 일시에 녹아 흐를 것만 같았다. 막둥이는 나보다 앞서 나와 벌써 바지 지퍼를 열고 있었다. 나는 간신히 어지럼증을 억누르고 그와 일 미터쯤 떨어져 둑의 경사면에 날아가 박혀 있었다. 흘끗 돌아보는 내 눈에 그의 자지 끝이 잡혀 들었다. 그것은 눈을 부릅뜨고 대지를 향해 날아가는 창날처럼, 수평이었다. 굉장한 달빛이구나. 내가 꿈꾸듯 말했다. 원시 종족들은 있지, 남자가 없이도 아이를 밸 수 있다고 여겼단다. 달 빛에 닿기만 해도 아이가 들어선다고 믿었거든. 남자란 다만 처녀막을 찢 어 달빛이 몸 깊숙이... 골방에 직진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줄 뿐이라는 거야. 배가 납작하게 주저앉아 있던 여인들이 달빛과 한번 만나기만 하면 뱃속이 하루가 다를 만큼 통통하게 속이 차서 이윽고... 만월과 같아지는 거지. 오늘 같은 밤엔 수많은 여인의 골방에 싹이 들이박힐 거라구. 정말 광장하잖니? 뭐가요? 달빛, 아니면 여자요? 막둥이는 하품을 하며 심드렁하게 반문했다. 내가 바지를 추스르고 있는데 그는 여지껏 오줌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냉기는 싸늘했다. 나는 막둥이보다 앞질러 재빨리 차의 운전석에 앉았다. 그와의 이 무위한 갈등과 대결 국면을 끝내고 싶기 도 했지만, 포장도로와 달리 거기부터는 섬새한 운전기교가 필요했기 때문 이었다. 그는 내가 핸들을 붙잡고 앉은 걸 보고도 아무 반발 없이 차를 돌 아 조수석에 올라탔다. 전방에 보이는 다리만 돌아나가면 멀긴 하겠지만 곧 고향 말을이 보일 것이었다.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나중 강경읍 내로 이사가기까지. 골방과 다름없는 두 칸짜리 일자초가였던 고향집에서, 사십 년 남짓 살면서, 딸 일곱 아들 둘을 낳아 그 중에서 딸 넷과 아들 하 나만을 건졌다. 내 위로 다섯 번째 얻은 형은 홍역을 앓다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마흔하나에 나를 낳았는데, 사진으로 보건대, 깡마른 체구와 깊 은 눈자위와 덕지덕지 앉은 검버섯 때문에 그때 이미 노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홉 명의 새끼를 배고 낳는 동안에 어머니의 자궁은 아마도 오래 된 모시적삼처럼 헐거워졌을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얻기 위해 석불의 코를 갈아 마시고, 속옷 끈에 사시장철 나무도끼를 매고 살았으며, 줄줄이 남자애만 낳은 용철 엄마 개짐을 훔치려다 망신을 당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산치성, 절치성, 집치성, 뒤란의 칠성님, 부엌의 조왕님, 우물 의 용왕님 그리고 삼신할매에게 지극정성을 다했다고 했다. 아들을 낳기 위한 소망은 평생을 통한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삶과 덧대어져 원망이되고 원념이 되었다. 나이 마흔에 내가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당신의 생애에서 마지막 기회가 왔다는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원망과 원념은 어머니의 신경 줄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우주의 음기가 똘똘 뭉친 만월의 기운을 빨아들 여 이미 피폐해진 자궁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그 안에 고추 달린 사내의 씨앗을 틔우고자, 어머니는 한켠으로는 불안과 공포를 견디며 또 한켠으로 는 달의 신과 정면 승부를 위해 생명줄을 걸다시피 달힘 마시기를 했다. 초열흘부터 만월이 되는 보름까지 매일 밤, 보다 신신한 달힘 마시기를 위 해, 집에서 시오리길이 넘는 고내곡재까지 악써 왕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거의 원귀와 같았을 것이다. 마침내 고향 말을 차창에 들어왔다. 북향으로 드넓은 들판을 두고 사방 어디든 아무런 바람막이 하나없이 휑 하니 열린 민둥머리 터에 키 낮은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모습은 달빛 아래 놓고 보아도 전혀 고즈넉한 맛이 나지 않았다. 바람도 햇빛 한 점도 가릴 수 없는, 대대로 가나의 사슬에 묶인, 사철 특별한 이유도 없이 끄뎅 이싸움을 일삼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척박한 땅으로, 나는 어머니를 기억 하듯, 고향 마을을 기억했다. 불과 두 시감 반, 아니면 세 시간 달려오면 당도할 고향인데도 불구하고 대처로 떠돌기 어언 몇몇 해. 길로 오랜만에 나는 고향 마을을 보고 있었다. 저기... 저어기, 마을 좀 보렴. 마믐 막둥이에게 턱짓을 해보여TT다. 애비 고향이구나. 중학교 일학년 때까지 산. 저 오늘 학교 가야 돼요. 일곱시까지요. 막둥이는 내가 느끼는 감회 따위엔 전혀 관심 없었다. 둑길은 아주 요철 이 심해서 한동안 차가 제멋대로 키질을 했다. 논산 강경으로 우회하지 않 고 연무 톨게이트를 나와 황화를 거쳐 고향집에 이르는, 보다 번듯한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요즘은 달구지나 어쩌다 지나곤 하는 이 둑길로 차를 몰아 들어온 것은, 이 길이야말로 내가 고향집에 살던 시절엔 외부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강경 장날이면 이십 지 짱짱 한 둑길에 하얗게 이어지던 장꾼들의 행렬을 나는 상기했다. 그리고 읍내 에서 장사하던 아버지가 닷새 만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왔다가 또 자전 거를 타고 나가던 길도 이 길이었고, 둘째누나가 돈벌러 가고 셋째누나가 시집으로 떠나던 길도 이 길이었고, 그리고 오매불망 노래 한 소절로 세상 을 뒤흔들고 싶어하던 막내누나가, 두고봐, 속삭여 말하고, 서울 사거 저 별처럼 될 거야, 속삭여 말하고, 한밤중 가수의 꿈을 쫓아 나락값을 훔쳐 달아났던 길도 이 길이었다. 얼마나 별ㅂ이 휘황하게 쏟아지는 밤이었는지 막내누나가 끝내 혼백으로조차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던 그 밤엔 밤새도 록 통, 통, 통, 쏟아지는 별빛들을 튕겨내며 피폐하고 황막한 고향집을 등 지고 질주하는 누나의 모습이, 어떤 별은 기타, 어떤 별은 색은 드럼, 플 루트... 별의 광채에 싸여 노래하는 별 같은 누나의 보습이 꿈으로 나타났 다. 강경논산을 잇는 철로 위엔 길손처럼 시시때때 재처를 향해 기타가 지 나가고, 사시장철 벌판 끝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떠나고 싶었던 열망과 신 열, 삭이지 못해 용써 달려보곤 했던 바로 그 길을, 나는 지금, 쉰 살의 나이로, 내게 뭔지 모르게 날을 세우고 있는 열일곱 막둥이아들과 함께 가 고 있었다. 저곳에 대체 뭐가 있어요, 아부지. 이번엔 그가 먼저 말했다. 글쎄. 내가 태어난 집이 남아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좋아요? 뭐가 말이냐? 아부지 태어난 집요. 방 주 칸짜리 흙집이었지. 그런데 뭣하러 거길 가는 거냐구요. 그는 대들듯 내게 오금을 박았다. 지금 돌아가도 학교 등교시간을 맞출지 어쩔지 모르겠어요. 길도 나쁘고, 이만 돌아가요. 차가 수문옆을 지나갔다. 마을은 이제 지척인 듯 보였다. 잔해만 남은 수문의 녹슨 철구조 위에도 달빛이 질펀히 흘러내리고 있었 다. 저를 벌구지 위해서 이러신다면 차라리 돌아가 종아리를 치세요. 벌판 끝에 지나는 밤열차의 불빛이 얼핏 백미러에 담겼다. 두들겨패시라구요. 발길질을 하셔도 좋아요. 우리 학교 선생들은 등교길 교문 앞에서도 발길 질을 하니까요. 너도 발길질을 당해봤니. 저한테 발길질을 했으면 발목을 부러뜨려놨을 겨예요. 저는 걸릴 것이 있는 날은 교문으로 들어가지 않아요. 담장을 넘어가지요. 공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게로구나. 공부라구요,라고 반문할 때 그의 얼굴에 역시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 성적표 그럼 아부지는 안 보신 거예요. 그는 물었다. 지난번 성적 말예 요, 하마 같은 종수자식 땜에 꼴찌를 놓치다니. 자동차가 부르르릉, 비명을 지르다 멈췄다. 깊이 패인 곳에 바퀴의 한쪽이 내려앉으면서 하체 일부가 바닥에 닿았나 보았다. 네가 내려서 차 좀 밀어야겠다,라고 나는 말했다. 꼴찌를 하지 못 해 그는 아주 분하다는 표저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였던가. 나는 수심 가 득한 아내의 모습들을 두서 없이 화상했다. 내가 글쓰기의 분열하는 번뇌 를 짊어지고 있는 것만도 안타까워 아내는 잠짓 막둥이의 문제를 내게 감 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언제나 우등만 해오던 아이가 꼴찌까지 내려갔다 면, 그것이 막둥이의 의도적인 지향이었다고 해도, 아내는 견디기 힘든 고 통을 경험했을 것이다. 앞으로는 밀지 않겠어요. 우리, 돌아가요. 그는 조수석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문을 열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쑤와아, 수은과도 같은 희디흰 달빛 에 몰려들었다. 달은 그 사이 많이 기울어 멀리, 윤곽만 어슴푸레 보이는 미륵산 가까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영(山影)이 드리워 있는 둑길의 서편에 운무가 엷게 피어났고, 달빛만 요요한 동북방의 벌판은 둑길에서 지평선까 지 운무도 없이, 그러나 풍경의 세밀한 것들이 낱낱이 드러나지 않는, 하 나의 빛, 하나의 흐름, 하나의 이미지로 경계 없이 어우러져 있었다. 고향 은 마을은 지척이었는데, 지척에 있는 마을이나 지평선 가까이 물러나 있 는 마을이나 그 명암과 원근에 별 차이가 없었다. 달빛은 빛이면서 빛이 아니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명암과 원근을 쓸어 덮어버리면 그것이 빛일 수 있겠는가. 교교한 침묵의 세상은, 세상 그 자체가, 빛도 아닌 달빛이 꽉차서 그렇구나, 차라리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 속 같았다. 나는 차의 상 태를 상필 생각도 안 하고 망연자실 손을 내려뜨리고 서 있었다. 바퀴가 빠진 것만이 아녜요. 펑크 났어요. 그의 말에 비로소 나는 차를 보았다. 과연 바퀴 한쪽이 푹 꺼져 있었다. 스페어 타이어로 바꿔야 할 터인데, 그걸 바꾸기 위해서라도 일단 차를 움 푹 패인 곳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야 할 터였다. 그럼 내가 밀 테니 네가 핸 들 좀 잡아주겠니.라고 나는 말했다. 그의 입술이 옆으로 살짝 꼬리를 틀 어올렸다. 안 될걸요. 그는 말없이 말했다. 차는 물론 내가 힘써 밀어봤지 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하자꾸나. 마을 쪽을 일별하고 내가 말했다. 걷는 거야. 둑을 버리고 저기, 논을 가로지르면 마을까진 금방이야. 애 비 고향집에 다녀와서 바퀴를 갈고 출발하는 게 좋겠어. 달빛을 받으며... 들길을 건너... 너하고 함께... 그 집을 보고 싶다. 전 관심 없어요. 혼자 다녀오세요. 예까지 와서 그리 심통 부릴 거 뭐 있냐. 화가 나진 않았다. 예전의 나 같으면 벌써 그에게 화를 내었으련만, 하 다못해 땅바닥일망정 무릎 꿇리고, 어린 놈이 어디 차를 몰고 다니느냐, 웬 말대꾸냐, 도대체 한밤중 학생이 무엇을 하고 다니느냐, 악써 소리쳤으 련만, 그에게 놀랄 일이 세검정 집 골목에서 딱 만났을 때부터 줄줄이 딸 려나오고 있는데도 놀라기는커녕 화조차 나지 않는 게 신기했다. 화가 나 기보다 나는 오히려 연민을 느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어긋나기 시작했 는지 모르지만 미상불 그가 자꾸 이퉁을 부리는 것이 쓸쓸하고 안쓰러웠 다. 모든 게 다... 달빛 때문이야. 엎드린 고향집을 눈으로 더듬어야 나는 생각했다. 용인의 오두막에서 자장 넘어 세검정 집으로 달려간 것부터 그랬다. 꿈 을 통해 내게 전한어머니의 주술이 아마도 나를 달빛 속으로 끌어냈던 게 아닐까. 막둥이도 끌어냈던 게 아닐까. 심사 미터가 되는 담장을 밤짐승처 럼 민첩하게 그가 타고 내리는 걸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나는 구체적으로 예 까지 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세검정 집에서 성산대교, 성산대교에서 강변 로로, 제삼한강교로, 고속도로 입구로, 고속도로에서 다시 남쪽으로 남쪽 으로 내려온 건 돌이켜보니 내 의지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래. 달빛을 따라온 것이구나,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차갑고도 따뜻한, 어둡고도 밝은, 빈 듯하지만 꽉찬 달빛이 나를 유인한 게 틀림없었다. 그에 대한 나의 관 용도 따져보면 나의 참된 너그러움 때문이 아니라 달빛 때문이었다. 그가 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도, 그의 성적이 급전직하ㅎ다는 것도, 그가 전에 없이 날 불손게 대하는 것도, 달빛 속에서는 전혀 사실적으로 느껴지지 않 았다. 본래의 막둥이, 그가 아닌 그의 다른 허깨비 같은 영상이 교묘하게 연출해낸 애월(靄月)과 같은, 연극의 제일막쯤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따라오너라. 애야. 나는 부드럽게 그에게 말했다. 둑길의 경사면에는 달빛의 은색 비단이 깔려 있었다. 나는 미끄럼타듯 둑을 타고 내려와 고향지을 향해 곧장 걷기 시작했다. 그가 차문을 열고 나와 나를 뒤쫓아오지 않더라도 할 수 없었다. 논이 바싹 말라 있어서 나 는 논두렁을 버리고 직진했다. 띄엄띄엄 짚단들이 쌓여 있었다. 하나의 기 억이 달빛에 흠뻑 젖은 짚단더미 속에서 가볍게 솟아나왔다. 그래. 아아, 골방이다... 나는 참을 수 없이 혼자소리를 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마을에서 들 건너 이 킬로쯤 떨어진 북동간(北東間) 에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는 곳엔 짚단더미 어느 곳엔 볏단더미가 쌓 여 있었다. 불화(不和)는 내가 만난 최초의 세계였다. 아무 희망도 없이 논 다섯 마지기와 함께 피폐한 고향집에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고단한 어 머니의 삶을 떠올리면, 신경줄이 갈래갈래 찢어진 예민한 어머니와 떠나고 싶어도 어디든 떠날 수 없었던 네 분 누나가 한통속으로 빚어내는 불화의 연속이 하나 이상할 것 없었다. 누나와 누나끼리, 누나와 어머니가, 어머 니와 이웃이 걸핏하면 불 같은 격정으로 부딪치던, 삿대질, 욕설, 저주, 드잡이... 저주받은 그 무슨 미친 바람이 있어 끝없이 어머니와 누나와 마 을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당신 나이 마흔하나에 얻은 귀한 외아들인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했지만 나는 매일매일 결단코 집 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불화 끝에 속이 뒤집혀 머리를 질끈 끈으로 동 여매고 누워 있다가도 내가 들어가면 어머니는 앙상한 팔로 나를 당겨 안 았는데, 그런 때 내 온몸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했다. 언젠가, 나는 하 교길에 짚단더미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누워 빈틈 마다 짚단을 끄짚어 당겨놓자 따뜻하고 아늑한, 어두운 방이 되었다. 그 곁을 스쳐지나가는 친구들조차 내가 그 짚단더미 속에 들어 있다는 걸 전 혀 알지 못한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어머니의 품보다 얼마나 따뜻한지. 나는 자주 부드러운 어둠에 둘러싸인 그 골방에서 잠들었고, 자주 바람소 리를 들었다. 그날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던지 밖으로 나오자 온 세상이 캄캄했다. 별도 보이지 않았고, 바람은 씽씽 불었고 마을의 불빛은 까마득 히 멀었으며, 그나마 내 집이 있는 마을인지 다른 마을인지도 알 수 없었 다. 나는 와락 무서워져서 다시 짚단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비몽사몽에 내 온몸이 젖는 것 나는 느꼈다. 엄마 추워. 나는 사지를 잔뜩 오그리고 역시 꿈인 듯 생시인 듯 중얼거렸다. 추웠지ㅁ 무섭진 않았다. 비비적 비 비적, 나는 더욱 깊은 곳으로 더욱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여섯, 아니면 일곱 살이었을까. 나는 그러나 혼몽중에 십 년이나, 혹은 백년 전쯤, 아주 아주 오래 전, 그런 곳에 살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고열로 혼절해 있는 나를 짚단 속에서 끄집어낸 것은 하루가 지난 오후였다. 어머니는 그 일이 있고부터 내가 저물녘에도 돌아 오지 않으면 온 들녘 맨발로 내달으며 짚단더미마다 헤집고 다녔다. 그래 도 나는 초등학교 다 마칠 때까지 이따금, 아무도 몰래, 그 짚단더미 속, 깊은 자궁에서 잠자곤 했다. 원형(原形)의 원형(原型)에서. 갑자기 달리는 발소리가 났다. 발소리는 삽시간에 내 목덜미를 잡아챌 듯 다가들었고, 이어 옆을 후리 고 지나 앞으로 나갔다. 막둥이였다. 막둥이는 마른 논을 직진으로 가로질 러 뛰다가 마을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짚단더미 그늘로 쑤셔박혔다. 달빛이 잠깐 동안 힘차고 빠른 그의 몸동작에 부ㄷ혀 세필(細筆)로 찢어졌 다. 저 녀석 아무래도 몹시 와로운 게야. 나는 팔씨름에서 이기고 말없이 이층으로 올라가 버리던 날에 보았던 그 의 뒷모습이 또올랐다. 야생동물터럼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달의 처녀막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듯한 원망(怨望)의 황포함을 나는 보았다. 그에게 상처가 있다면 무었일까. 나는 싫어요, 아부지. 그가 짚단더미 그늘에서 말했다. 걸어서라도 지금 당장, 돌아가겠어요. 짚단더미 그늘에서 나와 그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으므로 나도 잠시 멈춰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어나가 봤자 타고 갈 차가 없을 게다. 나는 되도록 무심한 목소리를 내고자 하면 서 대답했다. 애비가 태어난 곳인데 여기까지 와서 안 보고 가면 언제 와 보겠니. 얼른 갔다 나오면 등교시간까진 그럭저럭 댈 수 있을 거야. 학교로 가진 않겠어요, 그냥... 갈 거예요.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냐. 성적 때문이니, 아니면 친구들하고 문제가 있 는 거니. 그까짓 대학, 가기 어려우면 포기하자꾸나. 엄마를 생각해봐. 오 늘에야 확실히 알았다만, 엄마는 너 때문에... 엄마 얘긴 하지도 마세요. 그가 내 말허리를 함부로 잘랐다. 아부지가 엄마의 뭘 알아요? 누나와 나의 뭘 알아요? 세상 짐은 다 짊어 진 것처럼 말하면서... 그냥... 용인에서 새떼나 보고 살면서... 너 이놈. 체내의 만조의 그것처럼 꽉차 있다고 느꼈던 월광(月光)들이 한 순간 썰 물처럼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작가였고 동시에 남편, 아버지였 다. 그 무엇인가에 불안하게 가위눌린 듯 하면서, 데뷔 이래 이십여 년, 그래도 쓰고 또 썼던 결과로서 현실적인 부가가치를 내가 스스로 희희낙락 누린 적도 한번도 없었다. 그런 것들의 현실적 부가가치가 있다며 내 몫이 라기보다 아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던 세월이었다. 최고의 아버 지는 아니었지만, 어둡고 고독했던 나의 어린 날들을 생각해 작가로서의 고단한 관성에 밀려 질주할 때조차 세 아이를 참으로 내친 적은 한번도 없 었다. 이제 달도 기우는 초로의 쉰살. 작가의 길도 생활인의 길도 잠시 등 지고 앉아, 저기 저 어둠 속 어딘가, 시간을 이기고 내가 찾아 나설 향기 롭고 그리운 새 길 하나 없을까 엎디어 있지만, 어찌 막둥이의 이 비천한 말을 견디겠는가. 애비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너무 화가 나서 말소리가 오히려 떨렸다. 애비가 용인에 있다고 해서 네게 못해준 게 뭐냐. 달빛을 등지고 선 그 의 눈은 또렷이 보이지 않았으나 내 눈엔 아마 광채가 서렸을 것이다. 방 장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소리쳤다. 듣자듣자 하니까 네 녀석이 아주 못 하는 소리가 없구나. 뭐, 새떼나 보고 살아? 네 녀석은 도대체 뭘 보고 사 는데? 어린 것이 차까지 몰고 나와 어디서 뭘 보는데? 잘못한 게 있는면 솔직히 사내답게 잘못했습니다 하면 될 걸 가지고 예까지 와서 감히 소가 지를 부리다니, 어리석은 녀석. 나는 그의 어깨를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지척의 마을에서 컹컹컹 하고 개가 짖었다. 따라오든 너 혼자 갈 데로 가 든, 네녀석 맘대로 해봐. 아부진 왜... 왜... 절 없애라 했어요? 낮고 뾰족한 한마디가 목덜미로 날아와 박혔다. 가슴이 괜히 철렁해져서 나는 한 발을 내민 채 홱 고개만 뒤로 돌렸다. 홍두깨같이 불쑥 내밀어진 이 한마디는 무엇인가. 내 직관의 날들이 올올 이 곤두섰다. 이번엔 방향이 바뀌어 그의 눈빛이 똑바로 달빛을 받고 있었 는데, 예상대로 단검을 소매 속에 숨겨 가진 자객처럼, 그 눈에 찬 광채가 지나갔다. 무슨... 말이냐, 그건? 대답해주세요. 단지 가난해서요? 무슨 말이냐 묻지 않았니? 무슨 말인지 아부지는 알 거예요. 내 무릎에서 일시에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없애버렷. 아부지의 말소리가 들려요.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게 보였다. 아, 아냐, 얘야. 나는 황급히 말 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엄마가? 달은 순은의 빛을 하고서, 그러나 냉 기 서린 어두운 함정을 언제나 포함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네가... 뭘 오,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만,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설명해줄게. 필요 없어요. 그가 내 손을 뿌리쳤다. 설명은... 나도 할 수 있어요. 그때는 너무 가난했었다고, 형과 누나를 먹이고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고... 아부지는 작가였으니까요. 작가로서 나 아갈 꿈을 뱃속의 나와 맞바꿀 수 없었던 거죠. 함정은 깊고 어두워 그 끝 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앙갚음이 세상 에 어디 있단 말인가. 엄마한테 화내실 건 없어요,라고 그는 덧붙여 말했 다. 나는 엄마한테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누구한테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내가 엄마 뱃속에 들어 있었 을 때부터 아부지가... 저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구요. 그냥 저절로 느껴졌거든요. 아부지 말을 듣지 않고 한사코 나를 낳고자 했던 엄마를 미 워했던 것도요. 가족 계획을 설명하려 하지도 마세요. 모두 배웠으니까요. 널 미워한 적이 없었어. 나는 소리쳤다. 절대로. 얘야, 널 사랑해. 그것도 알아요,라고 그가 또한 맞받아 소리쳤다. 다 안다구요, 아부지. 그런데도 어떤 순간 제 맘이...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걸 어떡해요? 중학생 이 되면서부터... 아부지를 보면... 갑자기... 현실적으로요. 현실적으로 없애버렷, 없애버렷, 아부지 목소리가 또렷이 들린다구요. 미칠 것 같다구 요, 그럼. 아냐. 그,그럴 리 없어. 아부진 그때... 작가로 유명해지고 싶었죠? 아니라니까. 누구한테 그런저런 말을 듣고, 공부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니까 네가 어쩌다 환청을 느끼는 거야. 뱃속의 저는 전혀 아부지 안중에 없었어요. 그가 내 가슴에 무참히 비수를 박았다. 아부진 글쓰지 때문에 나를 죽이려 했던 거라구요. 내 손바닥이 달빛을 찢으며 날아가 그의 뺨에 감겼다. 나쁜 놈,이라고 나는 절규하듯 외쳤다.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아냐. 이 나쁜 놈. 이어 다른 손바닥이 또 날아가 그의 뺨에 감겼다. 절대로 이런 식의 음흉하고 교활한 음모엔 굴복할 수 없었다. 이것이 선험적이고 운명적으로 내게 찾아온 어떤 앙갚 음이라고 하더라도, 가까이는 가족부터, 멀리는 세상 끝에 사는 얼굴로 이 름도 모르는 그 누구에게까지, 꽃과 새와 나무에게까지, 성취를 위한 재빠 른 직진이나 설익은 재능의 광채가 아닌, 다른 부드러운 것, 예컨대 달빛 같은, 훈풍 같은 것을 도구로 삼아서 실낱만 하더라도 참으로 향기로운 길 내어 소통하고 싶은 그리움이, 지금 내 아무리 간절할망정, 나는 싸울 것 이었다. 아부지를... 미워하진 않아요... 그가 소리치고 뒤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리 안 와, 이놈. 이 나쁜 놈. 그의 빠른 뜀박질을 따라잡기에, 내 쉰 살의 손발은 역부족이었다. 그는 달빛을 직선으로 가르면서 벌판 한가운데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둑 너머에서 피어오른 안개떼가 벌판의 일부를 잡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고향 마을에선 개떼들이 맹렬히 짖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짚단더미 자락에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없애버렷. 내 가 말했던가. 그래. 없애버렷, 하고 나는 말했었지. 막둥이가 제 어미의 뱃속에 들어선 것은 아마도 칠십칠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포악한 유신 헌법이 깊어져 양심의 소리는 내기 어려웠던, 근로자의 육십여 퍼센트가 생계비에 못 미치는 육만 원 미만의 월급을 받고도 말로나마 따져 물을 수 없었던, 개인 개인의 숨은 꿈들은 빈사의 상태였던 그해 늦가을, 연탄가스 에 몇번씩 목줄을 뺏길 뻔했던 불광동 어둡고 작은 방에서 절망과 울분으 로 날려보냈던 달빛 한 점이 아내의 자궁 속에 박혀 똬리 틀고 앉은 건 운명이었다. 없애버렷, 나는 매일 아침마다 말했다. 아내는 돌아서서 눈물 을 훔쳤다. 난 수술 못해요,라고 아내가 말할 때, 어떤 날은 상다리 부러 질 만큼 밥상을 주먹으로 치고, 또 어떤 날은 화분을 메어던지고 또 어떤 날은 죄 없는 벽에 재떨이를 날려보내면서 나는 소리쳤다. 없애버렷. 없애 버렷. 수술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다음에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 아니 낳 고 난 그 후에까지, 나는 걸핏하면 눈 부라리고 없애버렷, 없애버리랬잖 아. 끊임없이 심통을 부렸다. 돈 떨어져 연탄조차 들여놓을 수 없을 때, 밤 새 코피까지 쏟으며 써낸 원고를 들고 잡지사에 찾아갔다가 편집자에게 수모나 당하고 돌아왔을 때, 아이 우는 소리에 그나마 쓸 수도 없을 때, 나는 그 모든 절망을 생명의 씨앗, 그에게 얹었다. 그의 말은 따져보면 모 두 사실이었다. 나는 너무 가난했고, 생명에의 참된 사랑을 알지 못했으 며, 세상을 잔뜩 미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철이 없었다. 우 주가 얼마나 넓은지, 부리로 알을 쪼아 깨뜨리고 나오는 어린 새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쑥새나 콩새들이 왜 머나먼 길을 떠나 시베리아와 남녘 땅 을 왕래하는지, 문학이 어디에 바쳐져야 되는지, 창 넓은 방과 골방의 차 이는 무엇인지, 소설의 집에선 어떻게 창을 내고 어떻게 불확실한 어둔 방 을 만들어 베치해야 되는지 나는 몰랐다. 다만 나는 그저 작가라는 이름으 로만 살고 싶었고, 작가로 불리기 바랐으며, 작가로 죽고 싶었을 따름이었 다. 경박한 야망이 내 가슴에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뒤집어 서 말하자면 부랑에의 야망이었다. 작가라는 이름의 양탄자에 실려 천지에 떠들게 될 내 모습을 나는 꿈꾸었다. 없애버렷. 나는 야심을 숨겨 가진, 그렇지만 사실은 아주 불안정하고도 이상하게 쓸쓸한 전사(戰士)였다. 그 때에도 나는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었다. 세상을 향한 야망의 창날이 높이 들릴수록 창을 넓히고 넓힐수록, 달려갈수록, 그창날이 거꾸 로 내 심장에 쑤셔 박히기를 바라는 끈질긴 살의의 본능. 나는 달빛 아래 엎드린 마을을 보았다. 개들이 이집 저집에서 악을 썼다. 나는 벌떡 일어나 두 주먹 불끈 쥐고 고향집을 노려보았다. 필생의 적 이, 야수가 발톱과 송곳니를 숨기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 다. 오냐,라고 나는 말했다. 오냐, 네 정체를, 네 심장을 꿰뚫어주마. 떨 리진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아주 예전에도, 그리고 굴암산 외딴 오 두막에 엎디어 홀로 있는 지금도 젊은 날의 내 싸움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 됐는지 정확하게 보려는 것일 뿐, 나는 언제나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나는 고향집 그늘 속으로 내 시선의 화살을 먼저 쏘아보냈다. 놈이 거기 있었 다. 평생 동안 어둡고 습한 내장 어디에 달라붙어 내 살의를 부추기고, 피 를 흘리는 부랑을 획책하며, 그러면서도 꽃뱀처럼 고혹적 자태로 나를 끌 어당기던 야수, 야수이며 천사인, 냉기이며 온기인, 어둠이며 빛인, 그 선 험적인. 나는 힘있게 걸어 고향집으로 갔다. 6 나는 과연 그 모든 것을 직접 듣고 만지고 보고 느꼈는가. 아니면 자라 면서 어머니와 누나들에게 들은 것을 오랜 세월 동안 내 직관과 상상력으 로 찌맞추다가 마침내, 그것들의 원형적 자궁, 고향집에서 하나의 구체적 삽화로 완성해낸 것인가. 어머니와 누나들을 통해 내가 분명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은, 출산의 고통이 시작됐을 때, 또는 그보다 훨씬 전, 내 명줄 의 씨가 은밀한 달빛에 실려 어머니 자궁 속에 들어가 박혔을 때부터, 확 고부동한 결심 하나를 어머니가 굳혀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평생 동안 가난과 격정의 가시에 찔리고 찔리면서 출구 없는 나날을 흘러와 온몸에 웅이가 꽉 박힌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아니 아들 하나 얻기 위해서 치 러낸 고통에 찬 어머니의 그 도정(道程)을 생각하면, 이제 마자막 찬스라 고 단정했을 때, 어머니의 원망(怨望)과 원념(怨念)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끽소리도 내지 마라들. 어머니는 뽀드득 이를 갈며 선언했다. 지지배면 엎어놔 버릴 것인즉. 나는 고향집에 와 있었다. 아직 여명은 터오지 않았고, 설핏 기울긴 했 지만 달빛은 여전히 요요하고 원융(圓融)했다. 갓난애가 어둠 속에서도 어 머니의 젖꼭지를 찾아 물 듯이 오랜만의 귀향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엊그제 다녀갖던 사람처럼 고샅을 따라 둘어와 정확히 고향 집 앞에 섰는 데, 집이 없었다. 불과 두 평쯤 됐을까. 창 하나 없이 좁아터진 아랫방과 아랫방보다 작은 윗방과 맨바닥의 부엌이 일자형으로 붙어 있던 흙집을 누 군가 마침내 찢어발겨 해체했는가보았다. 부서진 흙벽의 일부와 서까래들 이 온전한 집터 한켠에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내 고향집이 결딴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인 것 같았다. 어머니의 꿈이 내게 전한 주술은 이것이었을 까. 나는 두 눈 부릅뜨고 담장의 그늘이 아까보다 길어진 집터를 더듬으며 저기가 ㅇ방, 여기 아랫방,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여기야. 여기가 아랫방이었어. 나는 내가 태어난 바로 그곳, 아랫방 아랫목에 쭈그려 앉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회에 젖어 있긴 했지만 내 오관은 가지런했다. 나 는 담배를 입에 물고 성냥을 그었다. 그곳의 무엇이 나를 불러왔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다져진 맨땅 아니냐. 세상은 불화로 가득 차 있다는 최초 의 세계 인식이었다. 그러나 켜졌던 성냥불이 바람 한 점 없는데 툭 꺼지 면서, 달빛인가 물인가, 달빛에 잠겨 툭 꺼지면서, 내 오관의 바늘들이 처 음엔 미세하게, 그리고 이내 큰 파장으로 급격히 떨리기 시작했다. 오살 것. 불은 왜 끄고 지랄이랴. 표독한 말소리가 내게 들렸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물었던 담배를 바닥 으로 떨어뜨린 내 양손이 절로 모아졌다.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야 수면서 천사인, 어둠이면서 빛인 그 무엇이 난폭하게, 재빨리, 시간의 얼 레를 거꾸로 감고 있었다. 십 년, 이십 년, 삼십, 사십, 오십 년...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주저앉았다. 타임머신을 탄 듯 내몸이 과거 속으로 끌 려들어 가는 걸 나는 선연히 느꼈다. 양팔과 다리을 엑스자로 엇갈려 굽히 고, 허리를 활처럼 오그려뜨리고, 이윽고 나는 오십 년 전 그날, 음(陰) 팔월 스무나흘, 세상에 불가항력ㅇ로 내던져지기 직전의, 어머니 자궁 속 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개구기(開口期)였다. 시시각각 다급해지고 있는 어머니의 심장 박동소리를 나는 자궁 속에서 들었다. 발작은 더욱 더 빈번해지고 내가 열 달이나 살았던 골방속의 내압 (耐壓)은 초를 다투어 높아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렇지만 비명 한번 지 르는 법 없이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끽소리도 내지 마라들. 뽀드득 이빨 을 갈면서 물어뜯듯이 말하는 낮고 앙칼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분명 내 귀 에 들렸다. 끽소리도 내지 마라들. 지지배면 엎어놔 버릴 것인즉. 어린 두 누나는 윗방에, 얼여덟,열여섯의 큰누나 둘째누나는 아랫방 어 머니의 사타구니 곁에 있었다. 심야였고, 달빛도 별빛도 없었다. 황량한 늦가을의 발판을 달려온 바람이 간헐적으로 문풍지에 목 매달며 파르르르 떨 때마다 그을음이 많이 나는 등잔불이 자지러질 듯 너울거렸다. 어머니 는 문고리에 묶인 삼신끈을 양손으로 잡고 있었다. 내 어린 영혼이 어머니 의 자궁 속, 그 골방과 골방 안에 있는데 너울대는 등잔불빛의 명암에 따 라 모든 것이 똑똑히 보였다. 끽소리도 내지 마라들. 누나들은 끽소리도 내지 않았다. 유난히 심약했던 셋째누나가 막내누나를 부둥켜안고서도 공 포감을 참지 못해 짧은 비명소리를 한 번 냈을 뿐이었다. 어떤 찢어쥑일 년이 소리를 내냐, 소리를. 어머니가 즉각 오금을 박았다. 불탄 쇠가죽처 럼 검고 질긴 피부, 튕겨져 나올 듯 곤두선 핏줄, 솟은 광대뼈, 산발한 머 리, 등잔불빛을 받아 섬뜩한 광채로 흐르는 눈, 눈빛. 어머니는 사람의 형 상이라기 보다 차라리 악귀 그 자체였다. 자궁 속의 나는 어머니의 귀기어린 살의(殺意)를 알았다. 골방 밖으로 내 작은 몸이 내던져지는 순간 넝마 같은 피 젖은 이불에 엎어져 살해될 것이라는 사실은 아주 명확했다. 자궁 내압은 높아지고 그 충격으로 나의 외피를 싸고 있던 난막(卵膜)이 자궁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걸 나는 느꼈다. 그럴수록 나는 밖으로 밀려나가지 않기 위해 용을 썼다. 엄마, 살 려주세요. 나는 소리쳤다. 그러나 발작은 더욱 가속되고 어머니의 심장소 리는 천만군마처럼 나를 짓쳐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에서 검은 개가 짓고 있는가. 컹컹컹컹. 나는 필사적으로 본능적으로, 안쪽, 골방 안쪽으로 숨 으려고 버둥거렸다. 컹컹컹컹컹. 개들은 끈질기게 짖고 있었다. 지지배면 엎어놔 버릴 것인즉. 어머니가 또 말했다. 어머니로선 그것이 진통을 견디 는 비명인가보았다. 오랫동안 나를 부드럽게 안아뉘던 양수가, 나의 먹이 이고 숨(命)이었던 양수가 격류로 요동치며 한 순간 내 머리를 이미 열린 골방의 문지방에 박았다. 이제 절망이었다. 나는 난막을 움켜잡으려 했으 나 소용없었다. 난막도 양수도 더 이상 내편이 아니었다. 컹컹컹컹컹. 골 방을 포위하듯 둘러싼 어머니의 전신이 심하게 경련했다. 전양수(前羊水) 가 터지면서 곧이어 만출기(晩出期). 폭풍 같은 마지막 단계의 내압이 내 몸을 발작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둘째누나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으읍 신음소리를 냈다. 컹컹컹. 아가리를 찢어놓을 년,이라고 어머니가 역 시 냉큼 비명을 내뱉었다. 불가항력적 파장에 밀려 내 머리가 골방 아래쪽 의 열린 통로로 내려가고 있었다. 머리통이 으깨어질 것 같았고 뒤로 밀린 전신은 불바람 속에 있었다. 컹컹, 하고 짖어대는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뽀 드득, 뽀드득, 어머니가 이빨을 가는 소리. 마침내 살기 가득한 광채가 내 정수리에 와 박히는 걸 나는 느꼈다. 등잔불빛에 내 정수리가 드러난 것이 었다. 엄마 어떡해. 큰누님의 낮은 울부짖음이 들렸다. 세상의 광채는 표 독스럽기 그지없었다. 문고리에 묶인 삼신끈과 삼신끈을 잡은 어머니 손목 의 핏줄이 한 순간 팽팽히 곤두섰다. 낡은 삼베개짐에 아들에의 원념을 실 어 이미 몇 달 전부터 여러 번 어머니가 황소 오줌을 묻혀놓은 삼신끈이었 다. 어머니는 눈을 감지 않았다. 충혈된 두 눈 더욱 부릅뜨고 읍, 어머니 가 악써 어금니를 물었을 때, 골방 안쪽의 거친 내압이 나를 던지듯 밀어 냈다. 머리가 음열(陰裂)사이를 완전히 빠져나오고부터는 모든 게 재빨리 진행되었다. 나의 완벽한 절망이 내 사지의 힘을 모조리 뽑아내 몸통의 만 출을 오히려 도운 결과였다. 뭐, 뭣이냐. 숨을 몰아쉬며 어머니가 물었다. 큰누나가 벌벌 떨면서 피투성이의 연약 한 내 몸을 잡았다. 내 몸은 상한 쥐처럼 작고 더러웠다. 아 뭣하고 있어, 이 썩을 년아. 어머니가 악써 상반신을 일으켰다. 내 몸을 간신히 잡은 큰 누나의 손이 떨면서 이불 위로 올라갔다. 등잔불 좀 가차이 대봐라잉. 어 머니의 목소리는 너무 긴장하여 유리조각같이 갈라져 있었다. 둘째누나가 등잔을 내 사타구니 쪽으로 옮겨오는데, 갑자기 문풍지기가 격정적으로 떨 면서, 훅 하고 불이 꺼졌다. 오살년 왜 불은 끄고 지랄이랴. 성냥을 찾아 불을 켜는 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고, 고추예요, 엄마. 큰 누나가 먼저 소리쳤다. 너울거리는 등 잔불빛이 피를 잔뜩 묻히고 웅크려 있는 내 생명줄, 자지 끝에서 타고 있 었다. 됐다,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잔혹한 싸움 끝에 승리의 월계관을 걸 머쥔 만족스러운 미소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히려 처참한 눈빛이 었다. 됐다. 나가서 솥뚜껑소리 꽝꽝, 옆집 정순네한테 들릴 만큼 꽝꽝 내 면서 밥 하고 미역국 끓여라잉. 작은애 넌 가위하고 솜 가져오고. 셋째누 나 막내누나가 비로서 울음을 터뜨렸다. 근데 엄,엄마. 애가 왜 안 울어 요? 큰누나의 다급한 목소리. 어머니의 상반신이 다시 발작적으로 들렸다. 애를 줘봐. 어머니는 모질게 내 발목을 쥐고 탁,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쳤 다. 내가 얼마나 격심한 공포감에 잠겨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지 어머 니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탁, 탁, 탁. 어머니의 손매는 모질었 다. 나는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둘째누나의 손에 가위 하나 들려 있는 걸 그때 보았다. 가위는 한쪽이 반쯤 부러진 것이었다. 끽서리도 내지 마라들. 지지배면 엎어놔 버릴 것인즉. 어머니의 살기 가득 찬 말소리가 천지사방에서 내게 쏟아지고 있었다. 만약 동네 개들의 소리에 옆집 사내가 불려나오지 않았다면 내 고향집이 허물어진 빈터에서 그것의 주줄에 걸려 이번엔 쉰 살의 작가인 내가 죽어 넘어졌을지 몰랐다. 거기 누구 있소, 하고 우렁우렁한 경계의 말소리를 앞 세우고 한 사내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나는 비로소 공포의 결박에서 풀려 나 식은땀으로 젖은 몸을 바닥에서부터 일으켰다. 이게 무슨 꼴인가. 오십 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이라 했거늘, 겨우 야행으로 돌아온 고향 집터에서 식은땀이나 흘리고 엎드려 있다가 고향사람과 부딪치게 되다니. 미상불 한 밤중의 야행이 애당초 그랬던 것처럼, 달빛의 요사한 술법에 걸렸던가보았 다. 사내가 비추는 플래시 불빛이 얼굴에 닿았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 밀 려나오다가 등잔불의 횡포한 불빛에 최초로 부ㄷ쳤을 때처럼, 나는 진땀에 젖은 아미를 숙인 채 속수무책 플래시 불빛을 받았다. 꿈속의 어머니가 사 방에서 내쏘는 광채에 들러싸여 속수무책이었던 것과 같이. 누구요,라고 사내가 자못 거칠게 물었다. 거기 누구요? 여기의 나는 누구인가. 달은 어 느새 기울었고 곧 여명이 터울 시각이었다. 7 아내는 식탁의자에 앉아 있고, 나는 거실 소파 비스듬히 기대 반쯤 누워 있었다. 아내는 여성 잡지를 뒤적거리고 있고 나는 신문을 펼쳐 들고 있었 다. 그러나 아내는 여성 잡지를 보고 있지 않았고 나 또한 신문을 읽고 있 지 않았다. 딸이 귀가하여 않은지라 집엔 아내와 나 둘 뿐이었다. 아내는 참을성이 대단한 남자였다. 내가 특별히 훼방놓지만 않는다면 저대로 앉아 서 아내는 또 밤을 새울 것이다. 벌써 닷새째였다. 아버지를 미워하진 않 아요,라고 서리치면서 벌판 끝을 향해 달려가던 막둥이의 등판에 쏟아지던 달빛을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달빛은 정말 원융(圓融)했을까. 사물을 낱낱이 가르는 게 아니라 원근도 명암도 없이 사물을 융합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원만한 구족(具足)의 한시적 상태일 뿐 시간의 순환성을 극복한 것 은 아니다 모자란 것이 차올라 만삭(滿朔)이 되거 나면 찬 것들은 다시 기 우나니... 지금은 바로 하현(下弦)이었다. 아무래도 신고를 해야 할까봐 요. 갑자기 아내가 여성 잡지를 소리내어 덮었다. 나는 들고 있던 신문을 내리고 그녀답지 않게 적막의 균형을 먼저 깨뜨리고 나선 아내를 뜨악하게 바라보았다. 벌써 닷새가 지나가요,라고 아내는 덧붙였다. 수중에 가진 돈 도 얼마 없었을 거예요. 대관절 얘가 어디 있는 걸까요? 아내의 눈가에 이 윽고 눈물이 핑 돌았다. 막둥이가 그날 이후 여지껏 돌아오기는커녕 전화 한 통화 없으니 아내로서는 전화통화만 지키고 앉아 있을 수가 없는가보았 다. 아내에 대한 연민이 나를 사로잡았다. 없애버렷,하고 자고 나면 말하 던 시절에 아이를 없애지 않으려고 내게 받았던 수모와 억압은 물론이고, 유난히 예민한 세아이를 키워오면서, 남달리 격정적이고 변덕스러워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신열만 만나면 반광인(半狂人)이 되곤 하던 내 분열 증 때문에 자고 나면 흰머리가 늘어나는 아내였다. 무기(無記)의 자비로운 자궁이 되어 네 식구의 격정을 말없이 받아온 아내지만, 아내라고 해서 홀 로 짊어져가는 선험적 고독이 없는 건 아닐 터였다. 나는 다가가 아내의 손을 잡았다. 오늘 밤만 기다려보자구. 오늘 밤에도 이 녀석 연락 없으면 내일 아침 신고할게. 아내가 내 어깨에 얼굴을 내려놓고 울기 시작했다. 드넓은 거실의 창 한켠에 활대를 엎어놓은 듯한 하현달이 떠 있었다. 걔 친구 집도 일일이 모두 가봤는데... 라고 아내는 말했다. 아니야. 나는 고 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 서울에 있진 않을 거야. 두고봐. 제 가슴속에 불길이 사그라지면 아주 건강히 돌아올 거라구. 한 일주일 넘기지 않아. 손가락에 장이라도 지질 수 있어.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막둥이가 지금 어디 먼 곳을 떠돌고 있으며, 하지만 오늘 내일쯤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걸 나는 믿고 있었다. 아버지를 미워하 진 않아요. 마지막 달빛을 등지고 달려갈 때 막둥이가 했던 말은 진심이었 음이 틀림없었다. 나 또한 어머니를 미워하진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보다 더욱 확고한 믿음의 근거는, 자동차였다. 그날 동이 트고 나서 다시 벌판 가로질러 차로 돌아왔을 때, 펑크로 주저앉아 있던 아반테의 바퀴가 스페 어 타이어로 바뀌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안개 속 어느 지점을 달리도 말고 그는 멈춰 서서 싸우듯이 고향집으로 달려가고 있는 나를 아마 돌아 보았을지 몰랐다. 맷돌 같은 그 무엇을 짐져온 내 굽은 들을 그가 보았을 까. 과연 무엇을 그는 내 굽고 마른 등에서 보았을까. 확실한 것은 아비를 생각해 방향을 바꿔 돌아와 그가 무릎 꿇고 앉아 타이어를 교환해놓고 떠 났다는 사실이었다. 윗도리를 벗어젖히고 달빛 온몸으로 받으면서 원년을 씻어내려는 장인(匠人)처럼 힘써 타이어를 교환하고 있는 그의 자태는 내 상상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웠다. 전화벨이 그때 울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화들짝 놀라면서 식탁 위의 전화기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막둥이야,라고 말하는 아내의 표정에 떠오른 직관을 나는 보았다. 아내는 식탁의 전화기 를 나는 거실의 전화기를 동시에 들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내가 두 번 불렀을 때 그가... 엄마, 했다. 엄마, 저예요. 조심성이 깃들인 목서리 였지만 예감대로 어조는 단아하고 맑았다. 여기 부산인데요, 몇일만 더 있 다가 올라갈게요. 아내는 울음을 참기 위해 호흡을 고르면서 돈은 있느냐 고 간신히 물었다. 걱정 마세요. 그의 목소리가 소년답게 씩씩해졌다. 여 기 부두예요. 부두에서 일해서 돈 벌고 있어요. 저 힘세잖아요. 달빛 받고 있는 바다가 아주 근사해요. 아부지 고향... 그날 밤처럼요. 전화가 끊어 졌다. 불현 듯 한쪽 날이 부러진 가위 하나가 떠올랐다. 큰누님 둘째누님 에게 내 탯줄을 자른 가위가 한쪽 날이 부러졌던 것이라고 내가 말하자 누 나들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이나 있다가 무릎을 쳤다. 그래, 맞아. 근데 네가 어떻게 그걸 아냐. 신기하구나. 봤으니까 알지,하고 나는 웃었다. 세 상에 나오면서 내가 직접 다 봤다구. 정말이야. 하현달빛이 비스듬히 거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내 뭐랬어? 나는 아내를 끌어당겼다. 달빛은 긴 소파의 끝에 앉은 아내의 발등까지 올라왔고, 추녀 끝에 달아맨 풍경이 딸랑딸랑 맑은 소리를 냈다. 내가 삼베가짐으로 된 삼신끈과 등잔불과 한 쪽 날이 부러진 가위를 보았듯이, 오살년, 왜 불은 끄고 지랄이랴, 어머니 의 표독한 말을 어머니 뱃속에서 들었듯이, 막둥이 녀석도 이미 제 어미 자궁 속에서 없애버렷, 나의 말을 정말 들었던 것일까. 당신을 사랑한다는 걔 말, 들었죠, 하고 아내가 말했다. 못 들었는데. 나는 도리질을 했다. 걔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태평한 자식, 겨우 달빛 타령이나 하구, 이 녀 석 들어오기만 했다봐라. 피, 그 말이 그 말이지, 작가라는 양반이 참말 말귀도 못 알아듣네. 아내는 비로서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신신한 그 무엇이 나의 내부로 강하게 뚫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달빛일까, 아니면 풍경을 흔들고 가는 바람의 원형일까. 나는 어머니, 어머니,라고 발음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이상야릇한 심리적 전이가 내 내부의 골 깊 은 뜰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아내의 발등과 발가락들 사이로 달빛의 푸른 양수가 풍성히 흘러들고 있는 걸 나는 뚫어져라 보았다. 그것은 정결하기 이를 데 없는 심해어(深海漁)의 지느러미 같았다. 그래. 역시 달빛이야. 달빛의 정령(精靈)들이 힘차게 체내로 들어와 쾌속 질주로 확산되면서 내 전신의 세포들을 젊은 날의 그것처럼 푸르게 깨워 일으켜 세우는 걸 나는 느꼈다. 그것은 뜻밖에도 통렬한 성욕이었다. 밀귀 못 알아듣는 작가인 줄 이제야 알았남,이라고 허드렛말 앞세우고 나는 이내 아내를 거칠게 거실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아내는 폭이 넓은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어머, 이 이가 미쳤나봐. 아내의 주먹이 내 어깨를 두들겼지만 잔뜩 독이 오른 내 욕구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긴 치마가 위로 젖혀져 올라갔다. 미,미쳤어. 당신... 커... 커튼도 안 치고... 미쳤어, 정말. 커튼을 젖히듯 아내의 팬 티를 단번에 끌어내렸을 때, 나는 헙, 숨을 막았다. 여름숲처럼 무성한 음 모(陰毛)에 뒤덮인, 살아서 전신으로 숨쉬는, 한없이 어둡고 한없이 깊고 한없이 부드러운 아아, 그리운 골방. 엄마,라고 나는 비명처럼 소리질렀 다. 아내가 알사탕 깨물 듯이 깨득깨득 웃었다. 나야, 엄마. 성급하게 지 퍼를 내리면서 나는 말하고 있었다. 안아줘. 안아줘 엄마... 라고, 멀고 먼 풍진의 세상을 굽은 등 깡마른 다리로 걸어봐 마침내 나는 쓸쓸하고도 요요(姚姚)한, 슬프고도 원융한 나의 신부에게 당도해 있었다. 나의 그것 은 청대(靑竹)처럼 꼿꼿하게 일어서 전저리를 쳤다. 눈물이... 목울대로 먼저 넘어왔다. 8 마을 이장이 오두막 앞을 지나고 있었다. 이장님, 굴이 어디쯤 있나요, 라고 내가 물었다. 날씨가 쌀쌀했지만 볕이 워낙 좋아서 읽던 책을 들고 마당의 평상에 막 나와 앉은 직후였다. 글쎄요. 이장은 손차양으로 햇빛을 가리며 굴암산 중턱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동제(洞祭)를 안 지낸 지 오래 돼서요. 깍은 알밤처럼 똑 떨어진 삼각구도로서 꽤 잘생긴 산이었다. 굴암 산(屈岩山)이라는 이름이 산허리쯤 어디,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굴에서 유래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팔십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을 집집마 다 추렴을 해서 굴 앞에 가 동제를 올렸다고 했다. 동제를 안 지내면 동티 난다던데요, 하고 내가 말했다. 웬걸요. 동제야 안 지내도 시시때때 고사 는 지냅지요 우리 동네 고사는 다 굴쪽으로 향(向)을 잡아 올리니까 일테 면 제(祭)야 늘 올리고 있는 택이지요. 근데 굴은 왜 찾으세요? 내가 한번 들어가보게요, 하고 웃었다. 하이고, 아서요. 이장은 단번에 손사랫짓을 했다. 굴 앞에서 솔가지로 불을 때면 다음날 성남 쪽 어떤 산에서 연기가 나온다는걸요. 수십리지요. 예 살면서 이장님은 한번도 들어갈 생각 안하 셨습니까. 했지요. 한 십년 됐나 모르겠네. 젊은 청년들하고 큰맘 먹고 들 어가봤는데요, 글세, 처음 십여 미터쯤은 사람 하나 구부리고 들어가기가 어려워 용을 썼더니만, 얼마 가니까 휑하니 넓어지더라구요. 얼마나 넓어 지는데요? 장정 서른 명은 넉넉히 앉을 수 있겠습디다. 사방이 바위로 맥 혀서 틈새가 없었는데 거참 묘하지. 아주 어둡진 않더라구요. 근데 거기부 턴 정말 애 하나 지나가기도 어려울 만큼 좁아져 그냥 되돌아 나왔어요. 초로의 이장은 새삼스레 아쉽다는 표정을 했다. 꽉 막힌 듯하지만 아주 어 둡진 않고, 열린 듯도 하지만 아주 밝지도 않은, 부드러운 빛이면서 부드 러운 어둠인, 짚단더미 속, 내 유년의 달콤한 잠이 누워있던 골방이 생각 났다. 굴 안이 어떻던가요,라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내가 물었다. 복더 위였었는데 거기 들어가니까, 그저 서늘아데요. 이장의 눈빛에 온화한 기 색에 지나갔다. 겨울에 들어가면 따뜻하겠네요. 또 내가 물었다. 이장은 뒤편의 비닐하우스에 가는 중이었다. 암요. 그렇겠지요. 고개를 크게 끄덕 이며 이장이 대답했다. 안녕히 가세요. 내 눈이 다시 읽던 책으로 갔다. 에스터 하딩은, 달의 여신을 섬기는 원시 종족들은 그들 시대가 황폐해지 는 게 풍요의 본질적 정령이 이 세계에서 도망치기 때문이라 믿었다고 썼 다. 현대의 고통조차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최종적으로 인간 원형의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달과 신화와 여성과 에로 스의 운명적 관계를 주의 깊게 들여다본 그녀, 에스터 하딩은 그녀의 명저 [사랑의 이해]에서 이렇게 썼다. 소아시아인의 왕은 누이와 딸과 관계맺음 으로써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 그 결합의 신화를 재창조했던 것이라고. 아들이 성년에 이르었을 때 그는 어머니의 사랑이나 근심에 반(反)해서 희 생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서, 그리고 어머니가 내린 명령 에 의해서 희생된다,라고. 아도니스는 그의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첫 번째 형태들 중 하나인 곰에게 공격을 당하고, 아티스는 그의 어머니 시벨이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거세하고 목숨을 끊어버린다,라 고. 그리고 에스터 하딩은 놀랄 만한 통찰력을 가지고 또한 이렇게 썼다. ... 어머니는 이중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밝은... 관대한 어머니지만 어 두운 면모를 가진 그녀는 무섭고 잔인하며 아들의 유아적 의존을 참지 못 한다... 아들을 죽여서, 오리시스가 상자 속에 갇혔던 것처럼 나무상자 속 에다가 가두어놓게 된다...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아들을 희생시킴으 로써만... 이라고 에스터 하딩은 썼다. 무엇인가가, 어떤 순간,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오관으로 만지고 확인한 원형적 결론과는 다른 직관이었다. 나는 발작적으로 칙을 집어던지고 일어섰다. 신워(新 月), 발아(發芽), 에로스, 그리고 검은 달, 죽음, 파괴라는 따위의 낱말 들이 두서 없이 떠올랐다. 차고 기울고, 차면 생육(生育) 기울면 사멸, 달 의 결영(缺盈)이 생명의 본원처럼 영속적일망정 오늘은 초하루... 달도 뜨 지 않는 죽음의 삭(朔)이었다. 놈은 죽어 암흑 속에 묻혔으니 내 살과 뼈 를 녹일 수도, 내 영혼의 심지를 뽑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전신이 탱탱히 부풀어오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분노였다. 고향집을 향해 달려갈 때의 분노조차, 고향 집터에서 내가 똑똑히 보았던 어머니, 누나, 부러진 가위, 그 모든 것조차 그렇다. 그것은 알고 보면 모두 교묘하게 짜인 속임 수가 아닌가. 안아줘. 안아줘 엄마. 목메어 무릎 꿇었던 내 자신의 모습은 치욕스러워 더 이상 회상할 수도 없었다.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어둠 이고 빛인, 무성한 수풀로 뒤덮여 수줍은 색시처럼 얼굴을 가린, 그러나 살아 있는, 거기, 음모(陰毛) 너머, 골방의, 교활한 속임수. 전갈의 그것 과 같은 독기가 내 안으로 빠르게 고여들었다. 나는 굴암산 중턱, 숲 뒤로 숨은 굴을 눈 부릅뚜고 노려보았다. 네가 거기 있구나. 곡괭이 하나 찾아 들고 나는 다시 전사가 되어 앞으로 나갔다. 강렬한 살의가 나를 사로 잡 았다. 햇빛 밝은 정오였다. 해설 : 김화영 중편소설 [골방]은 인간의 심성 밑바탕에 깔려 있는 대립적인 두 세계의 상관관계 혹은 갈등관계를 달의 신화적 이미지에 의존하여 구상화한 작품 이다. 어두운 골방과 창 넓은 집 혹은 광장, 닫혀진 세계와 열린 세계, 음 습함과 밝음, 달빛과 햇빛 등이 그 대립적인 두 가지 세계다. 이야기의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일단 1) <이제 온갖 회한과 회의에 가득 차 스스로 자원해 아웃사이더의 골방에 몸을 뉘려 하고 있는 쉰 살의 아버 지>와 2) <광대무변한 인생을 향해 푸르른 말처럼, 속도감과 긴장감과 순 결하고 정직한 직진의 감수성으로, 그것들을 무기로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 나갈 열일곱 살의 아들> 사이의 대립으로 치닫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자신의 끝없는 부랑과 <조포한 질주> 혹은 살의를 잠재우기 위 하여 아들에게는 <단단하고 실팍한>, 창이 넓고 양지바른 집을 지어주며 햇빛같이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이 대립관계의 실체, 즉 그 애매성에 대 한 인식에 도달한다. <방마다 창을 내려는 것은 원심력의 상징이며, 그것 은 결국 골방 안으로 들려는, 운명적 구심력에 대한 공포감의 반작용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곧 삶과 신화 특유의 반대감정양립성(ambivalence) 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이미 도입부에서 달의 신화 해석을 통하여 신성함 과 불길함이라는 양립성으로 예고된 깨달음으로 결국 <두렵고, 그리운, 내 골방>이란 양립적 의미로 귀결된다. 그러나 도입부에서 만나게 되는, 오두막 동창 밖 풍경 묘사와 전화통화 중인 <나>의 내면적 상념의 스피디한 교차, 달빛 속 귀향, 아득한 짚단더 미, 죽음과 탄생의 이미지 통합등 매력적인 여러 대목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불필요하게 장황한 설명과 설익은 이론, 혹은 현학적 포즈들이 소 설이 확보해야 할 침묵과 여운의 공간들을 잠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취약점을 드러낸다. 에스터 하딩의 신화 이론이나 윤회설보다는 창 밖에 내려앉은 한 마리의 콩새가 소설 속에서 더 웅변적이다. 유랑 지은이 : 성석제 유랑 서(序) 내가 사는 동네에 십여 년 전에 문을 연 술집이 있다. 그 술집의 주인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인이었다. 실제로 그 술집을 꾸려나가는 건 언 행이 점잖은 노인이 아니라 그의 벙어리 아내였다. 벙어리라는 것은 그 여 인이 말하는 것을 본 사람이 전혀 없다는 데서 유추한 것이다. 벙어리는 대체로 귀머거리이기 쉬운데 주문이나 부르는 소리를 정확하게 알아듣는 것으로 봐서는 귀머거리는 아니었다. 노인은 손님들이 조금 복잡한 요구를 하든가 하면 여인에게 조그만 소리로 그 요구를 전하는 일말고는 하는 일 이 없이 하루 종일 취해 지냈다. 그러나 아무리 취해도 언행에는 어그러짐 이 없었고 술꾼들이 항용 그렇듯 남을 붙들고 시비를 하거나 큰 소리 한번 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늘 불그레한 안색으로 술청 한구석에 앉아 거리를 내다보면서 거의 정확한 시간을 두고 거의 같은 동작으로 가볍게 잔을 기 울여 몸속의 술기운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술집이 문을 연 뒤 십여 년 동안 주변은 하루가 다르게 달랴졌고, 그 술집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대부분 바뀌었는데 그 집은 처마끝부터 문턱까지 무엇 하나 바뀐 게 없는 듯했다. 숟가락, 그릇, 커튼처럼 닳고 깨지고 해지는 것조차 그전과 다름없는 모양의 제품, 또는 아주 약간만 다 른 것으로 바뀌곤 했다. 달력처럼 한 해를 한 번 바꾸어 걸지 않을 수 없 는 것도, 그날그날의 날짜를 표시하는 커다란 숫자에 절기며 음력 표시가 세세히 들어가는 구식 달력이 해를 가리키는 숫자만 바뀐 채 매년 똑같은 자리에 걸리곤 했다. 십여 년 전에는 하루 한 장씩 뜯어내는 그런 달력이 흔했지만 지금이야 그와 같은 것을 구하려면 꽤 공을 들여야 할 터인데도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어김없이 똑같은 것으로 걸렸다. 새로운 시속만 찾는 세태에서 그토록 변하지 않으면서도 그 술집이 십여 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벙어리 여인의 매운 손끝과 정성스러 운 손맛 덕분이 아닌가 싶다. 허름한 탁자일망정 늘 금방 행주가 지나간 듯 물기가 조금 느껴지게 청결했고 조촐한 안주 역시 칼칼하고 야무진 맛 이 나서 한번 그 집의 단골이 되면 그 동네를 떠나기 전에는 좀처럼 그 집 출입을 그만둘 수 없었다. 다만 그 술집에서는 단 한 가지 종류의 술과 안 주만 팔았기 때문에 다양한 걸 좋아하는 시속 술꾼들이 단골 되는 일이 드 물어 손님 수는 많지도 적지도 않게 적당했다. 술은 노인이 늘 누런 양은 주전자에 담아 마시는 탁주, 안주는 그 노인이 늘 앞에 놓고 조금씩 집어 먹는 콩자반에 포무침, 나물 한 접시, 김치 한 보시기, 날고구마 썬 것인 데 날고구마 계절에 따라 있기도 하도 없기도 했다. 그걸 술집에서 팔고 마시는 술이라고, 또 안주라고 말하기는 뭣할 것이고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인데 술값 또한 싸지도 비싸지도 않아 원재료 의 두 배 정도를 받 는 것 같았다. 그 술집은 술꾼은 술꾼이 일어날 생각도 하니 않는 아참 아홉시면 문을 열었고 저녁 아홉시면 문을 닫았다. 조금 더 먹자고 떼를 쓰려고 한들 벙 어리 여인에게 말이 통할 턱이 없고 노인을 돌아보면 세상을 초월한 듯한 안색이며 표정에 어지간한 사람도 말을 길게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러다 보니 그 술집은 오로지 그 노인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시간에 문을 열고 그 노인이 술을 그만 마시는 시간에 문을 닫는 것이 되어 도대체 장 사를 하려는 술집인지 아닌지를 모를 지경이었으며 어느 한적한 시골의 사 랑방을 도시에 옮겨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또 그런 곳을 좋 아하는 나 같은 단골이 있게 마련으로 장사가 영 안 되는 술집도 아니어서 십여 년을 변함없이 동네 한구석을 지키고 있게 되었다. 벙어리 여인의 나이는 대략 오십대 중반에서 육십대 초반 사이로 보였는 데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는 행동과 늘 엷은 미소를 머금고 다람쥐처럼 모 습과 잘 어울렸다. 노인의 얼굴을 불그레한 동안이었고 수십 년을 장복해 온 탁주 덕분인지 살결은 보기 좋게 부푼 흰 빵처럼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 다. 그 역시 벙어리 여인의 곱게 늙은 섬세한 이목구비와 조화를 이루어, 어차피 뜨내기인 변두리 동네의 속인들이 두 사람을 쉽게 보지 못하게 하 는 굳세고도 독특한 힘과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 봄날 노인이 탁 자에 앉은 채로 앞으로 쓰러졌다. 구급차가 달려왔고 노인은 병원으로 실 려갔다. 당연히 술집은 문을 닫았고 서너 달이 지나도록 여인의 손처럼 자 그맣고 단단한 자물쇠가 걸린 채 굳게 닫혀 있었다. 혹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그 집에 다니러 왔다 들어가지를 못하고 어정거리는 사람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슈퍼에 들러 사연을 물어보고는 느닷없이 무슨 바쁜 일이라도 생긴 듯 가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 술집이 언제 다시 문 을 여는가에 관심을 가질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건 나도 마 찬가지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술집에 다시 발걸음을 한 첫 번째 사람이고 또 마지막 사람이어서 다음 같은 편지를 쓰게 되었다. 실상은 편지가 아니 고 벙어리 여인이 구술한 것을 내 나름의 상상력을 조금 보탠 뒤 의고(擬 古)의 투를 빌려 편지로 옮긴 것이다. 구술을 했으니 벙어리인 줄 알았던 여인은 벙어리가 아니었던 셈이 된다. 어느 날 오후 그 술집의 문이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삼분의 일쯤 열렸다. 노인이 앉아 있던 자리에 노인이 입고 있던 한복의 잿빛 옷자락이 보였고 탁자위에는 노인이 살짝 들어 기울이던 양은 주전자와 복(福)자가 옆면에 그려진 사발이 놓여 있었다. 나는 반가움과 궁금함에 무심코 그 술집에 발 을 들여놓았다. 노인이 앉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노인이 아니고 벙어리 여 인이었다. 여인은 취해 있었고 울고 있었고 흐트러진 백발 아래의 얼굴은 마주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노인이 돌아 가신 것일까,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노인을 추억하며 노인의 옷을 입고 노 인이 앉던 자리에 앉아 노인처럼 술을 마시다가 슬픔에 겨워 우는 것일까 생각을 했다. 여인은 인기척을 느끼고는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내가 이 웃 슈퍼의 주인임을 알고는 손가락을 들어 자리를 권했다. -내가 이러는 게 천하게 보이지요? 미쳤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내가 왜 이러는지 사연을 들어보시렵니까? 나는 여인의 입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말에 놀랐고 그 내용에 당 황했다. 나는 평소 그 여인이 벙어리처럼 행동하던 것같이 고개를 끄덕이 고 또 흔들었다. 여인은 검은 비닐 봉지에서 막걸리 병을 꺼내 주전자에 들이붓고 문을 닫은 다음 내게 다시 한번 사연을 들어보겠느냐고 물었다. 자세히 들으니 여인의 말투는 어눌하고 발음을 부정확했으며 어휘는 수십 년 전에 쓰던 것처럼 낡은 것이었다. 마치 어릴 때 말은 배운 후 무인도에 서 수십 년을 혼자 살아오다 세상에 처음 나은 사람 같았다. 하지만 내부 에서 무섭게 치밀어오르는 어떤 힘이 여인이 표현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 로 표현을 하게 하는 것이었고 광기지는 말 속에 선혈처럼 묻어 있는 것 같아 나는 연신 방아깨비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그 여인은 편지지며 봉투를 꺼냈고 수첩에 외상이며 사소한 거래에 관해 적던 낡은 볼펜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자신은 편지를 쓸 줄 모르는데 편지를 반드시 써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것이 그 여인 이 자기 사연을 들어보라는 이유였다. 나는 대신 말했다. 그것이 그 여인 의 자기 사연을 들어보라는 이유였다. 나는 대신 편지를 써주겠노라고 했 다. 그 여인은 몇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한 다음 편지에 적혀야 할 내용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구술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문득 공중을 향해 하하, 소리쳐 웃더니 술집을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書) 첩이 삼가 상공께 아뢰옵니다. 첩은 한낱 솜털도 가시지 않은 계집 아이 때에 이미 상공의 구명지은을 입었삽고 그 후로도 수십 년 동안 상공의 분 에 넘치는 사랑을 받자는 상공께서 미천한 이 생명을 당장 때려죽이신다고 해도 달리 할말이 있을 리 없습니다. 이제 새삼 무딘 혀를 놀려 상공의 귀 를 어지럽히고 겨우 원숭이를 면한 천박한 논리를 담은 글로 상공의 아름 다운 성명을 그릇되게 하지도 모르는 무도한 일을 감행함은 무슨 까닭이겠 습니까. 일전에 상공께서 낙향하시는 그 경황중에 여섯째 서랑(壻郞)이 큰 아이 를 남겼더이다. 그 아이는 상공의 피가 만분지 일이라도 섞인 덕분인지 총 명하고 어여뻤으며 가엾은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돌보는 호생의 덕을 지 니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상공을 실은 병원차가 매정하고 처참하게 가버린 뒤에 제가 더러운 눈물로 헛된 일생의 서러움을 닦아내는 동안 내내 죄도 없이 제 곁에 머물러 있었나이다. 그러다가 제 넋두리 속에 섞여 나오는 기박한 신세를 알고, 편지를 써주며 반드시 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그 아이의 손에 의지하여 상공께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드 리려고 합니다. 상공께서 늘 말씀하신 대로 첩은 왜인의 더러운 피를 받은 계집입니다. 운명의 날인 팔월 십오일을 당하여 첩의 부모는 귀국을 도모하느라 동서분 주하였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챙겨갈 금은보화며 가산이 얼마나 되었는지 무어가 그리 귀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제 부모는 하나뿐인 딸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오빠들이며 짐 실은 짐승을 재촉하여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나 이다. 제가 부모와 떨어져 밤새 울며 헤매던 곳이 상공께서 살고 계시던 산현입니다. 조선사람들은 제 울음소리를 듣고 나와서 저를 보고는 무슨 신기한 짐승 을 보듯 하였습니다. 제 옹색한 몰골이 어째서 중인의 마음을 끌었는지 모 르겠사오나 그들은 첩을 데려다 노리개나 하녀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아 아, 첩은 서로 저를 데려가려는 짐승 같은 사내들의 싸움터에서 하늘에 빌 었습니다. 이들이 싸움을 벌이다가 서로 물고 뜯어 모두 죽게 해달라고,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싸움 끝에 한 사내가 저의 팔을 잡아끌며 소리쳤 습니다. -이년, 너는 오늘부터 내 것이다. 너는 오늘부터 나의 집에서 마소처럼 일해야 할 것이며 자리 깔개처럼 나를 받들어야 하리라. 네년의 동족이 나 를 삼십여 년 동안 핍박을 한 것도 모자라 오늘 기어이 내피까지 흘리게 하누나. 아아, 아까운 내 코피 이년, 이 왜년. 첩은 그때 그 사람이 하는 조선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거 기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그가 한 말을 전해들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때 악 귀 같은 모습으로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피를 뿜으며 외치던 모습에서 그 사람이 한 말의 내용을 짐작했습니다. 아아, 짐작만으로도 첩은 이미 기절하기 직전이었지요. 그때 상공께서 모습을 보이시지 않았다면 첩은 한 가닥 정신을 보아 옛적의 조선 여인처럼 혀를 깨물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상공은 인근 고을에서 가장 큰 가문의 종손으로서, 인근 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장자(長者)로서, 인근 선비 중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 발 빠른 이에게서 산현마루에서 싸움이 났다는 말을 듣고 이 치에 밝고 매사에 한치 어그러짐 없는 심판관으로서 나타나셨습니다. 첩은 기억합니다. 검은 학생복에 관옥과 같은 얼굴을 꽃피운 듯 들고, 막 소요 하다 나온 듯 부채를 들고 걸어오시던 모습을. 그렇게 아귀다툼을 벌이던 사내들이 모두 눈만 끔뻑거리며 상공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을 때의 고요 를. 상공께서 구슬을 입 안에 넣고 굴리듯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습 니다. -여러 아저씨, 할아버지, 조카들, 형제들, 들어주시오. 지금은 조국이 광복하여 온 나라가 기쁨에 춤추고 있습니다. 이 여자아이가 비록 적국의 핏줄이라고는 하지만 경황중에 부모를 잃고 짐승이 나다니는 산길을 헤매 는 것은 우리의 아이들이 배고픔과 질병으로 부모를 잃고 유랑하던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 비린내 나는 아이를 두고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나서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으니 이 소문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우리 장씨 일문은 하늘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저의 팔 을 잡고 있던 털짐승 같은 사내가 불만스럽게 소리쳤습니다. -여봐, 조카. 이 아이는 내가 고개 너머 최가 놈들하고 피 터지게 싸워 서 끌고 왔네. 나는 유학까지 갔다온 조카에 대면 무식해서 아무것도 모르 지만 이 왜년이 최가 좀들 집에 가서 첩살이하는 것보다는 우리 문중의 개 가 되는 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해서 뼈가 부러지도록 싸워서 끌고 왔네. 그럼 조카는 이 왜년을 그냥 놓아주어서 최가에게 넘어가게 놔두자는 rp 가. 상공께서는 깊고 그윽한 눈을 들어 저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때 저는 상 공의 눈에서 한 점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서 무릎을 끓고 애원했습니 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저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잡히지도 않고 제 나라로 가겠습니다. 제 부모가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죽더라도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상공께서는 그 자리에서 제가 하는 일본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는 유 일한 분이셨습니다. 상공께서 하문하셨지요. -너는 어디에서 온 아이냐. 어째서 부모를 잃었느냐. -부모가 저를 잊고 도망을 갔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제 우리 가족은 산현 아래 주재소 사택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한밤 중에 그 마을 사람들이 그동안의 원수를 갚는다며 주재소에 뛰어들었습니 다. 저의 온 가족은 끈 끊어진 구슬처럼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네가 아직 물정을 모르는구나. 여기 둘러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너의 왜말을 알아듣는 이가 있다면 지금 네가 너의 가소로운 동족들을 구슬에 비유한 것만 가지고도 너를 단매에 쳐죽이려 할 것이다. 하여간 너는 어찌 하려느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어가겠습니다. 남쪽 항구 어드메에 본국으로 돌 아가는 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 가면 부모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 다. -여기서 너희 동족들이 모이고 있는 부두까지는 수백 리 길이다. 게다 신은 두 발바닥, 까치같이 작은 두 손에 의지해 걷고 기어간다 하더라도 족히 열흘은 걸릴 것이다. 가다가 잡혀 죽거나 봉욕을 겪지 않는다 하더라 도 굶어죽을 것이다. 산다고 해도 너의 본국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겠느냐. 차라리 사방이 잠잠해질 때까지 머물러 있다가 수습이 되면 길을 떠나는 게 어떻겠느냐. 첩은 상공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잠시 망연히 서 있었습니다. 미천 한 왜인 계집아이에게 그토록 호의를 베풀어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때 제 팔을 놓아주시던 털북숭이 사내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조카님. 해방된 대명천지에 어째서 배웠다는 사람이 한낱 거지왜년과 왜말을 길게 하고 있는가. 보아하니 조카가 저 뾰숭뾰숭한 계집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인데... 그러나 털북숭이 사내는 말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나이 지긋 한 노인이 등을 긁던 장죽을 휘두르며 호통을 쳤기 때문입니다. -네 이놈, 감히 어디다 대고 혓바닥을 요망스럽게 놀리느냐. 참새며 제 비가 어찌 홍곡(紅穀)의 뜻을 알겠는고. 너희 기파에서는 종손에게 그렇게 대하라고 가르치더냐, 천하에 불학무식한 놈. 상공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학이며 고 니의 춤인 듯 천연스럽고 우아하게 보였습니다. 신세가 바람 앞의 촛불 같 은 계집아이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상공은 호통을 치고 나서 부르르 흰 수염을 떨고 있는 노인에게 차군당(此 君堂)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나직이 노염을 거두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고는 털북숭이 사내에게 고기를 돌려 엄숙한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집아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관하여 오늘 저녁 장파, 중파, 기파, 세 문중의 종손끼리 의논할 것이니, 수고롭지만 아재비께서 기파 종손에게 어둡기 전에 집으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털북숭이 사내는 움찔하여 물러나 면서 말했습니다. -뭐, 이만한 일에 우리 문중 대소 종손이 다 모일 것까지야... -계집아이 하나라도 일단 우리 문중의 경계에 들어온 이상 어느 한 사림 의 임의로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 첫째 이유고 둘째는 빈번히 노장을 범하 는 상풍(傷風)을 의론에 붙여 근본을 바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큰 소리 뒷말 없이 마을 한구석 차군당 할아버님 댁에 얹 혀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차군당 할아버님 집 뒤안에는 대나무가 큰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집은 대나무 숲에 얹혀 있는 것처럼 자그마했고 저는 그 자그마한 집에 다시 얹힌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첩은 염치도 없이 병이 들어 눕고 말았습니다. 산이 설고 물이 선 까닭은 아니나 사람이 설고 인심이 선 탓은 있었을 것입니 다. 부모형제와 아득히 멀어져 다시는 볼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이 자리에 눕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고갯마루의 싸움에 놀라 어린 가 슴이 더 견디지를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기막힌 곡절이 제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까닭이올시다. 어찌 된 일입니까. 아아, 어찌 된 일입니까. 저는 하루라도 상공을 보지 않고는, 한시도 상공을 생각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미천한 첩이 어찌 그런 가당찮은 꿈을 꾸고 있었는지요. 차라리 상공은 저를 그 털북숭이 사내에게 넘겨 빨래하고 빗자루질하며 짐승처럼 짓밟히게 하시는 편이 나았습니다. 조선인이 본디 예의를 숭상하고 인륜 도덕에 어그러지는 일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으며 한낱 벌레라 할지라도 죽이고 살림에 연민과 법도가 있다는 것이 첩을 어찌 그렇게 괴롭혔겠습니까. 먼발치 담 너머로 상공이 부채를 저으며 고고히 산책하시는 것을 보며 첩은 소매를 씹고 고 름을 쥐어뜯었습니다. 혹 상공이 고개라도 돌려 집 쪽을 바라보시는 양이 면 얼른 담 밑에 주저앉아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던 게 몇번인지 도 모릅니다. 저를 보살펴 주던 할머님께서는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썰미만으로 그런 저런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셨나봅니다. 힘없는 오금, 열이 오른 이마, 왈 랑거리는 눈빛을 보고 제 마음을 속속들이 아셨습니다. 저를 나무라지는 않으셨지요. 혀를 차며 제 이마를 식혀주곤 하셨습니다. -어린 왜국 계집아이가 감히 우리 문중의 대종손을... 언강생심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랄 했는데 네가 아무리 지성을 다한다 한들 그 높푸른 잣나무가 네게 썩은 가지라도 기울여주랴. 어서 몸을 추슬러 네 나 라 네 부모한테 돌아가도록 해라. 그러나 어찌하리까. 저는 그때 불타오르는 빈집과 같았으니 몸과 마음을 상공께 내어주고 헛소리를 하며 앓았습니다. 다행히 제가 하는 헛소리는 모두 일본말이니 할머님이 알아들을 리는 없었습니다. -허흐음. 아무리 망국의 유리걸개(流離乞 )라 한들 우리 문중 땅에서 죽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의원이라도 들여오는 것이 좋겠다. 차군당 할아버님께서 할머님께 이르신 말씀입니다. -영감님, 돈이 어디 있어 우리가 죽어나가도 못 부르는 의원을 부른단 말이오. -내 나가서 종손과 의논하리라. 한번 구명했으면 끝까지 살리는 게 당연 한 법. -종손은 요즘 노름에 빠져서 집에도 안 들어온다는데 누구와 뭘 의논한 다고 그러시오. 차라리 읍내 지서에 신고를 하는 게 낫겠소. 지서에서 왜 놈들을 모아서 제 나라로 보낸다고들 하니 이 아이도 그 틈에 따라가면 좋 지 않겠소. -하하. 할망구가 망령이 나도 여간 난 게 아니구먼. 지서에 가면 그 날 로 이 아이는 짐승이 되고 말아. 요전에 일본 순사 떨거지 하다가 맞아죽 은 최가 이야기도 못 들었는가. 제 동족도 그리 취급하는데 하물며 왜의 아이가 어찌 되겠소. 내 집에 제 발로 들어온 짐승도 먹을 것을 주고 살려 보내는 게 이치인데... 내가 알아서 하리니 할망구는 망령이나 다스리고 있으소. 그리고 꿈인 듯 홀연히 상공께서 저를 보러 오셨습니다. 그때 차군당 할 아버님은 할머니를 불러 똥지게를 지고 거름 내러 들에 나가셨지요. -어어이, 춥다. 네가 네 나라고 돌아간다고 울고 있다기에 내가 보러 왔다. 너의 부모의 이름은 무엇이고 본국의 집은 어디냐. 첩은 자리에 누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 떨어 진 이불 사이로, 다 떨어진 옷 사이로 첩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것을 어 찌할 수도 없었습니다. 상공에게서는 술과 마늘 냄새가 몹시 났습니다. -제 아버님의 이름은 하세가와 마사오라고 합니다. 읍내에서 기름장사을 했지요. -어머니 이름은 무엇이냐. -어머니는 미스코입니다. -미스코, 광자. 좋은 이름이구나. 내가 유학을 갔을 때 하숙집 주인 딸 이 광자였다. 광자는 밤마다 나는 찾아 이불 속으로 기어들곤 하였느니. 네 이름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이더냐. 첩은 혼백이 오락가락 오랜만에 듣는 일본말도 알아들었다 말았다했나아 다. -제 이름은 도미코이며 열여덟 살입니다. -열여덟, 열여덟? 믿기지 않는구나. 너는 스무 살의 미스코보다 더 숙성 한 것 같구나. 너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너를 늑대의 아가리에 서 건진 사람이다. 그때 제가 뭘 알았겠습니까마는 아는 것을 가지고 상공께 결코 거짓을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상공은 한사코 제가 거짓을 아뢴다고 말씀하 시더니 이불자락을 들추며 정말 열여덟인지 스물여덟인지 확인을 해보아야 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경황중에 이불 끝을 잡고 몸을 움츠렸습니다. -거짓을 말한 적 없습니다. 용서해주세요. -거짓말을 말한 적이 없다면서 용서는 무슨 용서란 말인가. 내가 긴히 살펴볼 것이 있으니 너는 이불을 놓아라. 첩의 몸은 주린 늑대라 하더라도 고개를 돌리 정도로 더러웠습니다. 머 리칼은 산산이 흩어졌고 얼굴에는 한 점 붉은 빛조차 없어서 사내인지 계 집인지 늙은 것인지 죽은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아야 알았을 것입니다. 그 러나 상공은 저를 아시며 저는 상공을 아옵니다. 어찌하여 저를 살핀다는 구실로 안간힘을 쓰는 손가락을 떼어내고 제 몸에 손을 대셨나이까. -너는 내가 너를 만지는 게 싫으냐? 이상한 일이구나. 나는 너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허, 가만히! -차라리 저를 죽게 해주시지요. 견디기 어렵습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것이 과연 왜놈의 피로구나. 상공께서 문득 제 눈을 오래 들여다보셨습니다. 저는 사지를 늘어뜨리고 천자의 서까래를 보며 울고 있엇습니다. 상공께서는 불현 듯 자세를 바로 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한번 시험해본 것이다. 저는 상공이 떠나신 후에 오래도록 흐느꼈습니다. 제 무릎에는 상공의 손길이 남긴 감촉이 눈물이 마를 때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상공은 제 육신 이 아직 남아 있으며 그건 예사롭게 버리고 다시 가져다 쓰는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제 하찮은 육신으로라도 상공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제가 어찌 가볍게 저를 저버리리까. 저는 다음날 곧 자리를 차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손이 발이되도 록 들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한편 차군당 어른 내외분께 조선말을 배웠 습니다. 그때는 감이 익고 있어습니다. 문중 마을 전체가 감의 붉은빛으로 환했었지요. 저는 일하고 일했습니다. 그게 상공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오동나무 잎이 떨 어져내렸습니다. 겨울이 되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할 일이 없어진 남정네들이 저를 기웃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계집년 걷는 걸 봐. 엉덩이 살랑거리는 게 꼭 사내를 열다섯은 잡아 먹을 것 같구먼. -아무리 들일을 해도 태어난 살색은 어쩔 수가 없구면. 쌀뜨물을 끼얹은 듯이 보얗지 않은가. 한입에 넣고 사곰사곰 씹었으면 좋으리. -가인박명(佳人博命), 길소다흉(吉小多凶). 저아이를 빨리 내보내지 않 ㅇ으면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걸세. 그때마다 차군당 어른 내외께서 우리는 저 아이를 친딸이나 다름없이 여 긴다네. -부지런하고 깔끔해요. 보시오. 마루에 먼지 하나 없어요. 손이 매워서 음식도 잘하고. 난 꼭 새 며느리를 얻은 것 같다오. 저 아이가 없으면 우 리 내외는 굶어즉을 거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본디 왜국 계집이라 간사를 떠는 것일세. 차군당, 그대 혹시 딴마음이 있는 건 아닌가. 고목에도 봄이 왔는다.? -예끼, 몹쓸사람. -여보, 함안댁. 해방 전에 못 보았소? 세상에 세상에 앙큼하고 흉악한 것들이 왜놈들 아닙디까. 사내들은 기저귀만 차고 계집들은 아예 속곳도 안 입고 다니다가 아무때나 일을 치르는 게 그 족속이라오. 저 아이가 자 꾸 예뻐져가니 동네 총각들이 저 아이만 지나가면 넋을 잃어요. 빨리 내보 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나도 나리다. 저 아이 때문에 혹 우리 아이들이 어 찌 되기라도 한면... 아유, 끔찍해, 그때는 함안댁이 책임져요!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첩은 그저 제 한 몸을 추스르기에 여 념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저 자신에게 골몰해 있는 동안 상공께서는 문전옥답을 처분해 읍내에 양조장을 차리셨지요. 그 전에 문중 사람을 모 아놓은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조선은 물화로써 흥기해야 한다. 묵은 학문은 소용이 없다. 나는 상학(商學)의 전공을 살려 읍내에 공장을 지으려 하니 뜻 있는 최씨들이 읍내의 요지며 공장은 모두 말아먹을 것이오. 그리하여 큰 반대 없이 사십 리 상거의 읍내에 양조장을 차리시고 매일 그 집에서 기생들을 불러모아 풍류를 즐기든가 노름 친구를 만나 쌀이며 돈을 퍼주신다고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첩이 태어난 집이 바로 대처 양조 장의 옆의 적산가옥이었으니, 상공께서는 그곳도 사들여 기름가게를 여셨 지요? 상공은 한번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첩으로서는 이런 생각도 하 여봅니다. 상공께서 산현마루에서 첩을 구하신 것도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그것 말고라도 상공께서 저를 문중에 데려다 구차한 삶을 이어가 게 한 것에는 필시 어떤 연유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지요. 후일 읍내에서 제가 들은바. 상공께서 일본인 여자를 산적의 손에서 구 하여 남쪽 항구까지 호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미처 살림을 간추리 지 못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다투어 상공께 모여들었고 두 손으로 집문서, 논문서를 받쳐 올리지는 않았던가요? 여하간 그 많은 집이며 재산을 술과 노름으로 거덜내시느라 해방레서 육이오에 이르는 그 기간이 상공에게는 길로 황금기였습니다. 그 시기는 실로 저에게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치욕적 인 세월의 연속이었고요. 그날이 언제였던가요. 이제 늙은 기억 속에서 끔찍하고 황홀한 하루는 옅어가는 노을처럼 자꾸 사라져갑니다. 어째서 끔찍하고 황홀한 하루는 옅 어가는 노을처럼 자꾸 사라져갑니다. 어째서 한평생을 따라 다니는 그 하 루를 그다지도 무심히 잊어버릴수 있느냐고 핀잔하신다 하여도 할말이 없 습니다. 저는 뽕을 따러 가고 있었지요. 그러니 감꽃 무성한 오월, 아니면 개살구 풋복숭아가 나오는 유월인가요? 땅에서 올라오는 축축한 기운이 무 릎으로 찾아들고 달맞이꽃처럼 키 큰 풀은 가슴을 간지럽혔습니다. 그렇습 니다. 그런 건 기억합니다. 사소한 것, 별것아닌 것, 아무 문제가 없는 것 은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아침 이슬이 막 걷히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지요. 상공께서 오랜만에 동네에 나타나셨지요. 아직 작취미성의 붉은 대추 같은 얼굴로 신작로를 가로질러 오신 것은 남이 보면 곤란한, 체면에 관계되는 급한 일이 있어서였겠지요. 뽕나무 잎은 그런 일을 가려주는 데는 그만이 었으니까요. 거기서 첩을 보신 것은 우연이십니까. -네가 누구냐? 상공께서는 놀란 얼굴을 하셨지요. 저는 그때 조선말을 어느 정도는 더 듬거리며 할 수가 있었습니다. -도... 도미코입니다. -오호, 도미코. 네가 이토록 고와졌단 말이냐. 너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일본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느냐. -가지 못하였습니다. 차군당 할아버님 댁에 있습니다. -호오. 보기 드문 절색이구나. 주더기 속에서도 빛이 나는 보옥이여. 금 낭의 거죽을 뚫는 황금 송곳 같은 어여쁨이여. 어디를 가는 길이냐. -뽕을 따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살며시 상공의 얼굴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제가 그토록 기 다리고 고대하던 상봉의 순간이 이렇게 쉽게 다가오다니. 저는 믿을 수 없 었습니다. 그러고도 또박또박 말대답을 놓치지 않았으니 왜의 계집이란 실 로 당돌한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뽕은 우리의 옷을 직게 하고 처녀들에게 사랑의 기회를 가져다주 는 것으로 예부터 노래가 있나니라. 뽕따러 가세. 뽕따러 가세. 뽕도 따고 임도 딴다네. 너는 이 노래의 뜻을 아느냐. 첩은 잠자코 고개만 숙였습니다. -모르느냐. 상공은 제 목덜미에 김을 뿜으며 은근히 말씀하셨습니다. 제 고개는 더 깊이 숙여질 따름이었습니다. 그때 수런거리며 소쿠리를 들고 이고 뽕 따고 임 따러 오는 여인네들이 없었다면 상공은 저를 어찌하려 하셨습니까. 첩은 상공에게서 생전 처음으 로 사내를 느꼈습니다. 남자의 냄새와 남자가 여자에게 원하는 것 전부 를. 첩은 무서웠습니다. -괜찮아. 너는 집에 가 있거라. 상공께서는 들고 있던 뽕나무 잎을 제 소쿠리에 넣어주시면서 속삭이시 고는, 용서하소서, 굵은 배암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셨습니다. 첩은 내내 그 뽕잎이 어째서 상공의 손에 들려 있었던가를 생각하면서 뽕을 땄고 집 으로 돌아왔습니다. 오후가 되자 상공께서는 저희 집 우 밖에 서서 저를 부르셨지요. -차군당 할아버지 계신가. 저는 그날 아침에 상공을 뵈온 이후로 내내 밥맛을 잃고 있다가 막 풋고 추와 물에 만 밥을 들고 부엌에 쭈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입 안에 든 밥알 을 ㅂ고 황급히 뛰쳐나간 것은 행여 상공이 가버리실까 하여서였지요. -할아버지께서는 마실 가셨습니다. 잠시 오르시지요. -지붕에는 풀이 자욱하고 구들장이 꺼졌으니 그 사이 몸을 잘못들여놓다 가는 깔려죽을까 빠져죽을까 걱정되지 않겠는가. 어째서 문중 어른 대접이 이다지도 소홀하더란 말이냐. 내 차군당 할아버지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 으니 할머님이라도 모셔오너라. 상공께서는 아침과는 달리 의관은 단정히 하셨으나 여전히 단감내가 풍 기는 목소리로 제게 이르셨습니다. -할머님은 문중 제사 준비차 가시고 아니 계십니다. -그러하다면 내가 방에 들어가 기다릴 것이다. 상공께서는 밖을 살피는 듯하시다 벼락처럼 들어오셔서 좌정하시고는 저 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올해 몇살이던가. 저는 왜 자꾸 나이를 물으시는가 의아하여 대답을 하기 전에 고개를 숙 였습니다. -네 자색이 곱다고 나무 하는 아이며 미꾸라지 잡는 총각들이 떠들어대 는 소리를 내가 귀담아 듣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실로 보고보니 색을 판별 하는 데는 반상이 따로 없고 종지(宗支)가 따로 없으며 아이 어른이 다르 지 않음을 알겠노라. 앉거라. 저는 무슨 긴한 말씀이 계신가 하여 윗목에 꿇어앉았지요. 상공께서는 저를 차근차근 살피시며 천천히 말씀하셨지요. -네 사는 데 어려움은 없는가. 무식한 것들이 놀리지는 않더냐. -아니옵니다. 모두 잘해주십니다. -이제 일본에 돌아갈 길은 영 막혔다. 어찌하겠느냐. 저는 가슴이 탁 막혔습니다. 일본에 간다 하여도 먼저 간 식구들이 어디 있는지 몰라 천애고아나 다름없어 무슨 일을 어찌하리요만은 그 길마저 막 혔다고 하니 혼이 달아나는 듯하였습니다. -읍내에 도는 소문에 부두로 가는 도중에 병들고 굶어 죽은 사람이 팔구 할이며 그나마 도착한 사람도 배가 뒤집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 다. 네 부모도 다른 길이 있었겠느냐. 네가 여기서 머물게된 건 하늘이 도 운 것이다. 양반이 사는 도덕군자의 동네에서는 아무리 적국의 잔당이라 하여도 아녀자를 해치지 않는다. 나로 말하면 소싯적엥 유학에 뜻을 두어 사서를 두루 깨치고 신식 학문까지 배운 사람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 면 쉽사리 일본 가는 길이 뚫릴 것 같지 않다. 일본은 망했으니 너는 나라 가 없다. 일본은 지금 미국의 장령인 맥 원수가 통치하고 있다. 네가 다른 요량이 없으면 이곳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가엾도다. 민들에 같은 것. 적국에 떨어진 어린 처녀에게 다른 요량이 있을 리는 없었습니다. 저는 컴컴한 굴에 들어가는 듯이 어지러워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후에 상공께서는 꾸짖으시기를 그때 네가 그런 요망을 떨지 않았으면 어찌 양반 의 몸으로 배추벌레 같은 계집아이에게 홀렸겠는가 하셨습니다. 진정 제가 요망을 떤 것이었다면 상공께서는 어찌 저의 몸을 탐하셨습니까. 정신이 들어보니 이미 일은 끝나 있었습니다. 상공께서는 더운 김이 나는 숨결을 내뿜으시면서 처음에는 <괜찮다>고, 그 다음에는ㄴ <내 너에게 한 살림 차려주마>고 두 번이나 욕심을 채우셨습니다. 제가 울면서 방바닥을 훔칠 때, 상공께서는 얼음이 낀 물처럼 차가운 목 소리로 이르셨습니다. -네가 오늘 있었던 일을 발설할 시는 동네에 남아나지 못할 것은 물론이 요. 네 하찮은 생명도 어떤 손에 요절날지 모른다. 네가 조용히 있겠다면 내 다시 찾아오마. 문을 열고 나가는 버선발이 어찌 그렇게 야속하던지요. 돌아서서 가시는 등모습이 어찌 그렇게 커 보이던지요. 멀리 안개 속으로 차군당 할아버님 이 오시던 모습에 얼마나 놀랐는지요. 두 분은 도중에 만나서서 한동안 무 슨 말씀인가를 나누셨지요. 상공께서는 그날 제사를 잡숫고 읍내로 내려가 셨다가 평소에는 참례 않던 지파 제사에 참례하여 사나흘 후에 다시 오셨 습니다. 그날 저는 다시 상공의 품에 안간 바 되었지요. 뽕밭에서, 선산 묏등에서, 콩밭에서, 또 물레방앗간이며 바위 뒤 가릴 것 없이 제 등판이 안 닿은 데 없이 하기 몇 달,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자 동네에서는 공론이 생겨났습니다. -종손이 읍내에 양조장 벌인 뒤로 기제고 시제고 발걸음이 인색하더니 어째서 출입이 잦은가. -그대는 모르는가. 세상에, 대종손이 하필이면 왜년에 빠졌단 말일세. -왜년에 한번 맛을 들이면 조선 여자는 쉰 보리밥으로도 아니 보인다고 하더군. 남편을 하늘같이 모시는 것은 물론이고 밤일에도 얼마나 지성으로 공궤를 하는지 모른다네. -자네는 왜년을 마누라로 못 둔 것이 그지없이 원통한 모양이네. 그러나 저러나 이 사실을 투기 많은 그 부인이 알게 되면 필시 큰 사단이 벌어질 걸세. -모르는 게 약이지. 우리 대종손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 말고는 아무 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 저는 우물가에도 냇가에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눈길이 무서워서였지요. 아이들도 물동이를 이고 가는 제 뒤를 쫓아다니며 돌을 던졌습니다. -쪽발이, 쪽발이, 게다 신고 지까다비 신고 물구덩이 넘는다고 깡총강 총. 차군당 어른 내외께서도 어쩔 수 없었지요. 저는 몇번 죽으려고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상공께서 제 목숨을 구원하셨으니 이제 상공께서 거둬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와 산현마루로 올라갈 적에 함안댁 할머님이 쫓아오셔서 제 보따리에 넣어주시던 따뜻한 주먹밥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너는 내 딸이다. 어른 계시는 쪽으로 큰절을 올리거라. 저는 그 고개에서 부모를 두 번 잃었습니다. 첫 부모는 한번 헤어진 후 로 아직 본 일이 없고 두 번째 부모는 늙어 돌아가실 때까지 더운밥 한번 차려드리지 못하였으니 종내 저는 천하에 없는, 남 곱절의 불효여식이옵니 다. 알고 모르는 길을 내처 걸어 상공의 양조장에 이르렀으나 상공께서는 아 니 계셨습니다. 맹세코, 제가 상공의 집 주변을 이틀 동안 멤돈 것은 오로 지 하직인사를 드리려고 한 것뿐이지 무슨 다른 마음이 있어서는 아니었습 니다. 그러다가 결국 지쳐 쓰러졌던 것이며 아가리 크고 송곳니 긴 개에 물린 것 때문만은 아니올시다. -이제 제 정신이 드느냐. 그 소리는 하늘에서 들리는 천신의 소리 같았습니다. 또 땅에서 울려나 오는 저승사자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또 뿔 달린 오니(일본의 잡귀)가 저를 놀리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누워 있던 곳은 상공이 화류병 치료차 가끔 드나들던 한약방이라고 들었습니다. 은밀하고 으슥한 구석방에서도 한약 냄새가 박하향처럼 코를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들었을 때나 정신을 잃어을 때나 한결같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상공과 박 주부는 스무 살 가까이 나이차가 졌는데도 서로 친구라도 되 는 양 말씀하셨습니다. 조선에서는 신분이 나이를 초월했는데 이제 세상이 달라져서 반상이 따로 없다고 하더이다. 그러나 상공께서 일대를 울리는 양반 가문의 대종손이며 양조장을 경영하시는 사업가로서, 신식 학문을 배 우고 화류계며 투전판의 좌장으로서 횡행하시다 보니 망년지교로 자연히 서로 말을 트게 되었다고 나중에 박 주부께서 설명해주셨지요. -저 작은 아이가 아이를 배었네. 그걸 아는가. 뒷방에서 두 분이 조심스러운 공론에 숨죽이며 귀를 기울이던 저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습니다. 저는 혹 비명이라도 새어나올까 헝겊으로 입 을 틀어막았습니다. -그게 내 아인지 아닌지 알 게 뭔가. 저는 이제 살 이유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야 한다고 결심 했습니다. 상공께서 생각하시기에 그때 제가 무슨 독기와 오기가 있어서 구차한 생을 이어나가느라 파드득거렸는지 모르겠다고 하시겠지만 저로서 는 어미가 된다는 것, 바로 상공의 씨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 제가 배운 것, 가진 것, 아는 것 이상의 엄청난 힘을 주었습니다. -자네 문전에서 쓰러졌으니 자네 애지. 경험 많은 사람이 모르는 척하고 그래. 상공께서는 한동안 침음하시다가 결심을 한 듯 말씀하셨습니다. -박 주부, 내가 나중에 갚을 터이니 이 아이를 기동하게 해주고 그 김에 살 만한 곳도 알아봐 주면 좋겠네. -자네 미쳤군. 이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아이를. 더구나 일인 계집을 어 떻게 건사하려는 건가. -그렇다고 내 씨를 밴 아이를 거적으로 말아 갖다 버리겠는가. 뒷일은 뒷일이고... 그래서 저는 읍내 적산가옥의 부엌방에 들게 된 것입니다. 그곳은 박 주 부가 어린아이를 몇번 치료해주어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의 집으로 바깥어 른은 해방 전부터 순사였습니다. 해방 후 잠시 실직했을 때 그 집을 접수 하고 머물렀다가 더 높은 자리로 복직한 다음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올까 말까 했으므로 집 안은 늘 조용하고 마당에는 꽃이 지는 때가 없었습니다. 안주인은 너그럽고 양순하여 저의 처지를 따져물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 다. 상공께서는 일체 발길을 않으셨고 저 역시 상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행복했습니다. 나날이 자라는 한 아이의 생명이 짐승이든 사람이 든 어미된 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상공께선 아시는지요. 요량이 없던 제게 요량이 생겼습니다. 아이를 낳고 길러 그 아이가 다시 아이를 낳는 날까지 제 목숨을 어찌하든 아어가겠다는 요량이었지요. 저는 바느질 감을 맡았고 빨래를 맡았고 서툴지만 텃밭에 나가 호미질도 했습니다. 그 렇게 밥값을 하고 아이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호랑말코 같은 쪽발이년. 내가 네년의 가랑이를 찢으리라. 본실(本室)께서 어찌 아셨는지 몇 명의 힘센 하녀와 함께 제가 얹혀사는 곳까지 들이닥치셨습니다. 부엌문을 열어젖히다가 그 서슬에 문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 북새통에 제가 언제 하녀의 발길질에 걷어채었는지도 모릅니 다. 저는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왜 살려달라고 빌지 않는 거야. 얘들아, 저년 옷을 벗겨라. 저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을 가려고 했습니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 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누군가 제 저고리 를 잡아뜯었습니다. 저의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하게 하고는 배를 밟았습니 다.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 제발, 제발. -오냐. 이제 바른말이 나오는구나. 그래도 벌써 늦었다. 이런 천하에 없 는 화냥년. 어디 가서 빌어먹지도 못하고 양반댁 사랑을 넘보느냐. 이런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년. 제가 어째서 부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기 버선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요. 막 박음질을 끝내고 뒤집어놓은 분홍빛 헝겊 조각을, 속 좁은 여자의 기억력 때문일까요. 그때 그 집의 안주인이 오시지 않았다면 저는 맞아죽 고 말았을 터이옵니다. -아아니, 어디 와서 이런 행패를 부리는 거요! -오오냐. 이제 보니 너도 한패로구나. 얘들아, 저년도 잡아 꿇려라. -여기가 누구 집인지 아는 거요? 순사 집에서 사람을 때리고도 모자라서 안주인까지 잡아 꿇리겠다는 겐가. 그제야 하녀들이 주춤거렸습니다. 순사라면 해방 전에는 우는 아이도 울 음을 그치게 하는 직업이었지요. 일본인이었던 저도 마찬가지였으니 조선 인이야 어릴 때부터 무서운 존재로 알았던 게 순사였겠지요. 조선 아이들 이 커서 하녀가 되었든 양반가의 종손부인이 되었든. -여기가 정말 그 댁이오? -그렇소. 보아하니 양조장 댁 부인이신 듯한데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가지 못할 줄 아시오. -그냥 넘어가지 못하면? 아아니, 그러면? -내 집에서 내가 부리는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놓았으니 전부 징역 살 각 오하시오. 바깥어른이 시키셨소? 그럼 안팍이 성하지 못하리라. 저는 부인의 성정을 오늘까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날 한마디 말 로 부인이 상공을 어찌 생각하시는지는 알겠더이다. -아니오. 이 일은 모두 사랑에서 시킨 일이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이 집을 찾아왔을 것이며 저 찍어죽일 것이 숨어 있는 것을 어찌 알 것이 오. -나중에 경찰서 가서 그렇게 말하시오. 유치장에 가서도 그리 말하시고 재판을 받거나징역을 살 때도 그리 하시오. 지금은 이 집에서 썩 나가주시 오. 거기까지 알아듣고 저는 까무러쳤습니다. 제 하혈로 부엌 바닥이 눅눅해 질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상공 의 아이를 유산했고 그 이후로 아이를 못 낳는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 니다. 그때 저에게 그리 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원망치 않습니다. 제 팔자 소관이 그러한 까닭이며 그 일 때문에 상공이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제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것. 상공은 제 손을 쥐셨습니다. 저는 눈물 중에도 웃었습니다. 이제 상공이 저의 저의 사랑인 줄 알았던 까닭이지요. 상공의 눈가에 번쩍 인 것이 눈물이었는지 땀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쨋든 상공은 감히 순사 간부의 집에 쳐들어가 순사부인에게 패악을 저지르고 그 부인이 부리는 사 람을 반쯤 죽여놓은 것에 대해 책임을 지셔야 했지요. 그러자면 순사 부인 에게 잘 보이셔야 했는데 순사 부인은 저를 먼저 위로해주기를 원하셨으므 로 연극을 하신 건지도 모릅니다. 또 왜 그러셨는지 모릅니다. 다만 상공 께서 저를 돌보겠다고 저와 제 곁에 있던 순사 부인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맹세하셨고 몸조리할 동안의 생활비와 약값을 보내오셨지 요. 저는 한 생명을 잃었지만 또 다른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 때문이었는지 한 달 후에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도미코 상. 양조장에서 사람을 보내왔어. 제가 치차꽃을 묶어 다발로 만들고 있을 때 안주인께서 저를 부르셨습니 다. 저는 치차꽃은 좋합니다. 어떤사람은 향기가 진해서 집안에 들이지 않 는다고도 하는데 제게는 치자가 있는 뜨락이면 어디나 다 고향처럼 느껴집 니다. 제 고향은 아시다시피 조선의 남쪽입니다. 양조장 사람은 저를 기차역으로 데려갔습니다. 백 리 어간의 고을에 호 젓한 방을 빌려두고 상공께서 기다리신다고 했지요. 저의 모든 고초는 그 곳에 정착함으로써 끝날 것이며 유랑의 운명도 자개상처럼 호사한 것으로 바뀌리라 하였나이다. 저는 조선의 이야기를 많이 알지는 못하는데 언젠가 [장화홍련전]이라는 기이하고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상공 께서 보내셨다는 심부름꾼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장쇠와 흡사했습니다. 우 락부락하고 무뚝뚝한가 하면 실실 헛웃음을 쳐가면서 말도 되지 않는 이야 기를 늘어놓자 노정 백리 길이 지옥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상공께서 혹 오해하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 값싼 눈물을 찍어 덧붙입니다. 장쇠처럼 생긴 사람은 상공이 보낸 심부름꾼이면서 부인에게 따로 당부 받은 게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첩은 십 리도 가기 전에 그런 기미를 알아 채고 기회를 보아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차역이 있는 읍내 지경 을 빠져나올 동안 그이는 저의 등에서 두 치도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은 인 적이 드문 산길에 이르자 속셈을 드러냈습니다. -부인께서는 현숙하고 도량이 크시다. 사십이 되도록 미성가한 나를 보 내 오갈 데 없는 너를 짝으로 삼으라고 하셨으니 너는 나와 더불어 이 길 로 먼데로 가자. 부인께서 질러주신 전대를 보니 우리가 놀아도 한두 해 보내기에 부족함이 ㅇ다 우리가 아직 젊으니 힘써 일하고 아들딸 낳아 등 따뜻하게 살면 그 아니 기쁘겠느냐. 네게 무슨 다른 길이 있으리오. 첩은 한동안 정신이 아득하였으나 곧 살 도리를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 다. -제가 한때 눈이 어두워 죽을 곳으로 들었으나 이제는 눈이 뜨입니다. 대저 시앗을 보면 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였으니 부인이 제게 하신 처사를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제 살길을 찾아주시니 그 말씀에 따 르겠습니다. 그이는 제 말을 듣고도 미심쩍은지 몇번 다른 말로 저울질을 하였으나 제가 하는 말이 같으므로 비로서 낯색을 풀고 말하였습니다. -네가 진정 살길을 찾았다. 나는 네게서 나오는 말을 보아 혹여 후일을 도모하려는 기색이 있으면 한칼에 죽여없애라는 부탁 말씀을 들었다. 너 같은 왜의 종자 하나가 칼에 찔려 죽은들 어떠하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들 누가 찾기나 하랴. 나는 그 길로 대처로 도망가면 그뿐이다. 너의 자색이 너를 살렸으며 너의 입에서 나온 말이 칼의 힘을 빼어벼렸다. 자, 그러면 너는 옷을 벗어라. 너의 몸이 네 말과 같은 지 확인하리라. 어느 주인 모르는 묏등에서 저는 꼼짝없이 겁탈을 당하고 말 지경이 되 었습니다. 소리를 친다 하여도 새소리만 들릴 뿐, 인적이 없는 길에서 누 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 주겠습니까. 첩은 갖은 궁리 끝에 옅은 소견으 로 꾀를 냈습니다. -지금 몸이 더러우니 뜻이 있다 한들 첫 행사가 원만하리까. 잠시 계곡 에서 씻을 겨를을 주시오. -상관없다. 빨리 시키는 대로 하여라. 내가 누구처럼 기생방 찾아 다니 는 한량도 아니고 계집 맛본 지가 하도 오래라 너를 보고 있기만 하여도 세 다리가 엉켜서 걷지 못 할 지경인데 씻고 자시고 무슨 겨를이란 말이 냐. -저는 본시 왜인의 딸로 지아비 섬긱기를 하늘같이 여기라 배웠습니다. 또한 왜의 여자로서 배운 것은 지아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할 때는 차라리 배를 가르고 죽을지언정 길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칼을 주시오. 제가 현숙한 부인과 장차의 지아비 되실 분이 애초에 계 획한 대로 모두를 이루어드리리다. -너의 말이 진심이냐. -그러합니다. 첩이 혀를 깨무는 시늉을 하자 비로소 그이는 허락했습니다. -오냐. 시간이 오래 걸려서는 아니 된다. 내가 남이 볼지도 모르니 너를 지켜주마. 상공이여, 용서하소서. 첩이 외간 남자에게 속살을 보인 것은 맹세코 그 때 한번뿐이었으며 그것은 살기위한 유일한 길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은 상공이 아시는 대로입니다. 그이는 제 살색에 현혹이 되어 저를 따라 물에 뛰어들었다가 스스로의 칼에 찔려 팔병신이 되었고 폭포에서 떨어져 반죽음이 되었지요. 저는 오 리 길이나 뛰고 달려 간신히 옷을 추려 입었 고 그 길로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무작정 떠났습니다. 혹 아는 사람을 만날까, 새로 아는 사람이 생길까 벙어리 반편 노릇으로 대처 바닥의 과부 술집 부엌 뒷방살이로 연명한 게 얼마였던지요. 상공을 뵌 건 전쟁이 나서 북이고 남이고 풍비박산이 났을 때, 상공이 피난길에 저를 본 때입니다. 그때 제가 종내 옷고름을 풀지 않았던 것은 상공께 무슨 원한이나 원망 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내들은 술과 계집질에는 모두 한통속으로 높 낮이가 없다는 것을 두고 경멸하자는 것도 아니며 그저 사내들이 제게 원 하는 것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이 더욱 많은 것을 내놓는다 는 문리가 트였기 때문입니다. 상공께서 범속한 사내들과 어찌 같으리요마 는. -네가 호락호락한 아이가 아님을 나는 안다. 네가 싫다면 그만이다. 남 들 다 나자빠져 죽는 세상에 내가 무슨 호강을 하리. 상공의 쓸쓸한 신색을 보며 저는 하마터면 무릎에 엎드려 기다려왔던 애 절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실컷 울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를 악물고 참은 까닭에 오늘의 제가 있고 상공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상공이 두고두 고 원망하셔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덧 전쟁의 먼지도 가라않아갈 무렵, 상공께서는 돌아가시는 길에 저를 데리고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본실께서 따로 속셈을 내어 저를 어 찌하려 한 것을 아시고 발연 대로하셨다는 것, 반죽음이 되어 떠내려 왔던 심부름꾼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것, 저를 찾아 수십리 사방에 사람을 놓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였다는 것 이제 세상에 드러내어 내 맘대로 삼처 사첩을 하여도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를 누누이 제게 설명하셨습니다. 첩 은 좁은 소견에 믿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방편을 열어주리. 너는 나와 돌아가서 읍내에서 떨어진 곳 에 주막을 열어라. 사람의 이목을 가리는 데는 그것이 제일이다. 너는 원 치 않는 외간 사람에게 술을 팔 이유가 없으며 손님은 나 혼자가 될 것이 다. 사람을 들여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겠고 그건 너의 처분에 맡긴다. 나 는 너에게 필요한 시량과 돈을 줄 것인데 오로지 지난날 네게 섭섭히 한 것을 갚는 뜻에서다. 어떠냐. 상공이 먼저 가신 다음, 첩은 몰래 이십 리 상거에서 상공의 뒤를 따랐 습니다. 상공께서 산현마루에서 뒤를 돌아보시면서 오래도록 서 계셨을 때 첩의 가슴은 어쩌면 옛날처럼 그렇게 떨렸겠습니까. 첩의 눈과 귀는 다시 어린 시절 산현마루에서처럼 멀고 먹었습니다. 성공 내려가시고 첩이 고갯마루에 섰을 때, 첩은 보았습니다. 온 말을이 불타듯 익은 감으로 환하게 물든 것을. 전쟁으로 아무도 건드리는 이 업이 저절로 익은 감은 나무 위에도, 나무 밑에도 흔전만전 마음껏 널려 있었고 첩에게는 그것이 어서 오라고 부르는 차군당 할아버님의 말씀처럼 들렸습 니다. 아아, 잊어버린 어머님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 다음 일은 상공이 다 아시는 대로이니 별로 아뢸 것이 없나이다. 하 지만 대필을 하시는 분이 자꾸 물어오니 상공께 흠이 되지 않는다면 뒷일 을 말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로소이다. 상공은 제게 조그만 초가 하나 와 땅에 묻을 술독이며 허드렛일을 할 사람을 주선해주셨고 저는 시골 길 가와 버들, 담 위 꽃이 되어 주막을 열었나이다. 근동에는 제 주막에 와서 감히 손목을 잡고 희롱하려는 자각없었던 까닭에 오롯 상공께서만 무상 출 입을 하셨고 다른 이들은 물만 먹고 술국만 먹고 가는 나날이 계속되었지 요. 본실께서 양조장, 신발가게 기름집, 대장간을 하나하나 무릎 앞으로 돌리고 악착같이 지켜내니 상공은 서른을 막 넘긴 나이에 이미 벼슬이며 영달에 뜻을 잃고 마흔이 넘자 취생옹(醉生翁)이라 자처하시며 낮이나 밤 이나 새벽이나 저녁이나 제가 담고 떠다드리는 술에 사셨나이다. 그러니 술집이 잘 될 리가 없고 상공의 가업 역시 돌보고 들여보내는 것 없이 나 날이 파먹기만 하는 형국이니 자연히 귀 떨어지고 헌 자개상처럼 변했나이 다. 결국 상공은 모든 것은 본실께 넘겨주시고 쫓겨나다시피 하여 저를 의지 하여 도시로 나오셔야 했지요. 상공은 저자의 뒷골목 구정물 흐르는 술집 뒷방에서 스무 해를 사셨지요. 첩은 없는 힘을 다하여 한때 익힌 술집 숙 수의 재간으로 호구를 하고 상공의 버선과 동정을 꿰매드리며 살아왔나이 다. 그렇게 살던 틈틈이 상공은 인연이 끊어진 본가라고는 하나 가문 대소 사에 종손으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시며 봄 가을에 한번씩 황황히 다녀 오시곤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녀오신게 올해 봄인데 그 이후로 병환이 드셔 누우시매 황망하고 참람함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견딜 일이었겠습니 까. -네 이년, 너 때문에 내 인생을 조졌다. 네가 내 혼을 녹이고 몸을 가루 로 만들었으며 돌계집인 주제에 나를 속여 자손을 끊었으니 살아서 가문의 동기를 어이 보며 죽어서 조상을 어찌 뵈랴. 흐으흐. 상공께선 머리의 핏줄이 터져 반신불수가 되셔서 대소변을 받아내는 서 너 삭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공께선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첩의 흰머리를 쥐어뜯으시며 대가 끊 어진 원망을 하셨으나 첩은 본디 돌계집이 아니었소이다. 그동안 차마 상 공께 아뢰지 못하였던 것이 앞서 적은 대로 본시께서 아이집을 발로 차서 깨진 밥그릇을 만든 까닭입니다. 상공께서는 본실이 미워 제 발로 나온 것 이 아니었소이까. 본실께선 상공을 몰아 낸 이후에 종부로서 거만의 재산 을 품에 안았으나 한 해 두 번 돌아오는 제사에 쌀 한 섬 내놓는 일조차 명분이 없다 거절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아아. 이 어찌 된 일입니까. 상공을 모시러 온 여섯 사위며 일곱 아들은 상공의 본실이 낳은 자손이라고 하시니. 상공 은 한 해 한번 사람 노릇 하시러 가신다며 산현에 가셨는데 그때마다 종가 에 들러 이제 본실의 슬하에 도야지처럼 다복히 십삼남매를 두셨으니 첩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지, 누구에게 원망을 들어야 하는지,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그 핏줄에 의지하여 마지막 글월을 드려야 하니 상공 께서는 병도 주시고 약도 주시는 분입니까. 아으, 사람의 일이 어찌 이렇게 사람답지 않은 것이오. 첩은 눈물을 뿌 리며 상공 계신 곳에 등을 돌려 전도를 모르는 유랑길을 다시 가옵니다. 부디 천년 만년 강녕하소서. 후(後) 언젠가는 그 노인에게 그 사연을 전달해주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편지 로 옮기게 하는 힘이 되었지만 편지를 다 쓴 뒤, 그 노인이 어디에 사는 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또 편지를 쓰게 한 여인이 어디로 갔는지, 편지를 전해주기를 아직 원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되었다. 내가 그 사연을 편지의 형식을 빌어 글로 옮기는 데 너무 많은 시긴을 잡아먹었기 때문인 데 그 시간은 이 년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내 서랍에 편지를 처박아둔 게 삼 년이 넘었다. 물론 그 여인이 편지를 가지러 올 것이라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들 부부가 사라지고 난 뒤 그 술집은 주변의 요요한 불빛과 밤늦어 취 객이 토해내는 토사물이며 오줌 속에 더럽혀지고 낡아가며 홀로 어둡고 깊 은 구렁이 되어 몇 달을 더 버텼다. 이윽고 때가 되자 건물 주인은 일꾼을 불러 가게 문을 열어젖힌 다음 먼지 쌓인 세간을 들어내고 해묵은 달력을 뜯어내 길에 버렸다. 며칠 공사를 벌이는 것 같더니 그 집은 안이 훤히 비 치는 유리문에 하루 종일 쿵따닥거리는 요란한 음악을 틀어대는 속옷가게 로 바뀌었다. 제기랄, 모든 게 너무 빠르다. 해설 : 이남호 성석제는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다. 그는 <세상에는 이렇게 산 사람도 있 다.>라는 식으로 [유랑]이라는 소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랑]은 하세 가와 도미코라는 한 여인의 생애를 압축해서 이야기해준다. 우리는 그 이 야기를 듣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세상에는 이렇게 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세상살이라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것이기도 하지>라고 느끼면 된다. 이것이 [유랑]이라는 소설을 읽는 독법이다. 단, 모든 이야기꾼이 다 그러하듯이 이야기의 재미는 절반이 이야기꾼의 입담이다. 마찬가지로 성석제의 소설에서도 소설 읽는 재미의 절반은 그 문체의 맛이다. 성석제는 [유랑]에서 옛날 문체를 빌려와 구사한다. 그렇 게 능란하고 정확한 옛날 문체를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옛날 문체의 맛으 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옛날 문체와는 상관없이 문체적 매력은 존 재한다. 그것은 상황을 설명하거나 상황에 관여하는 화자의 어투에서 나온 다. 그 어투는 가볍고 장난스럽지만 삶의 미묘한 음영을 놓치지 않고 드러 낸다. 그리고 사물과 인물을 아주 깊이 들여다보지만 결코 속에 빠지는 법 은 없다. 여기서 생기는 문체의 매력은 [유랑]을 재미있는 읽을 거리로 만 든다. [유랑]은 액자소설이다. 액자 속에 하세가와 도미코라는 여인의 기구한 삶이 들어 있다. 도미코는 해방되던 때, 부모가 버리고 도망간 일본 계집 아이다. 그녀는 한 남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뒤, 평생 그 남자의 그늘 에서 화를 당하고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이런 이야기 즉 한 여인의 기구 한 팔자 이야기는 그야말로 옛날이야기 감이다. 이 옛날 이야기가 소설이 되는 것은 액자형식 때문이다. 액자를 통해서 그것은 소설적 의미를 지니 게 된다. 그렇다면 [유랑]의 소설적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앞서 말한대로 그냥 이야기로 읽으면 된다. 그렇지만 굳이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세상과 맞지 않는 삶 또는 변하는 시속에 동화하지 못하는 것들의 존재 양상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세가와 도미코는 해방이 되었으면 일본으로 갔 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고 여기 남았으니 갖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 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맞지 않는 것들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곧 없어지든가. 해방 직후 도미코의 처지나 화자가 자주 들르던 그 변함 없는 술집의 처지나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바뀐 시속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존재들의 양상이 바로 <유랑>이라고 말하는 것 이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 유랑의 신세 속에서 작가는 어떤 기품 을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10년 동안 전혀 바뀌지 않는 그 술집을 묘사할 때, 작가는 거기에 어떤 <굳세고도 독특한 힘과 영역>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도미코의 삵과 또 그 편지의 어투에 작가는 나름대로 기품을 부여 한다. 작가는 그리고 작품의 말미에서 <제기랄 모든 게 너무 빠르다>라고 내뱉듯이 한마디 한다. 세상이 경박하게 이리저리 변할 때, 그래서 변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유랑의 신세가 될 때, 오히려 변하지 않음으로써 지키 게 되는 어떤 가치를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모든 것이 너무나 빨리 변하는 요즘 세상에서는 전혀 기품을 찾아볼 수 없 음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꿋꿋하게 변치 않음으로써 유랑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도미코의 일평생이 묘한 여운 을 남기는 작품이다. 서정시대 지은이 : 은희경 서정시대 누군가 가볍게 건드리는 기척이 느껴진다.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대 신 어깨 위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들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어가니 그것을 손가락으로 집어들 고 한참을 들여다본다. 나이가 들어가니 두피의 장력이 약해지는 것은 당 연하다. 그까짓 머리카락 한 올 떨구는 일까지 일일이 느끼면서 사는 내가 과민한 것뿐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리고 나의 과민 함에 대해 조금 더 똘똘히 생각해본다. 과민한 자의식, 자의식과 긴장, 긴 장과 소심함, 진지함... 정작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이 빠지는 데에는 아무 런 주위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 머릿속은 언제나 수많은 분석으 로 터질 듯이 복잡하지만 실제로 인생에 효용이 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내가 원형탈모에 걸렸다는 것은 며칠 안 가 드러난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던 나는 정수리께 한 부분이 아무리 빗어도 검은 색으로 덮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별 생가 없이 습관적으 로 빗질만 계속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그 빈터가 바로 머리카락 몽땅 빠져버려 드러난 밋밋한 두피임을 안다. 얼굴을 바짝 거울 앞으로 들이민다. 두 팔을 쳐들어 머리 속을 이리저리 헤집어보는 내 손길은 몹시 다급하다. 원 세상ㅇㅇ에, 내 머리 속에 땜통 이라니! 나는 울상을 짓고 허겁지겁 K에게 전화를 한다. 큰일났어. 머리 한복판 에 땜통이 생겼는데 원형탈모인가봐. K의 대답은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었 던 것처럼 거침없이 나온다. 뭐? 그럼 곧 대머리 되겠네? 거, 비 맞으면 딱딱 소리 나서 안 좋을 텐데. 박 부장 알지? 박 부장이 그러는데 자기 대 머리 의에 빗방울 떨어지면 말야, 그 소리가 군대 벙커 위에 떨어지던 시 끄러운 빗소리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더라. 참, 너 밥 먹었냐?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풀이 죽어 있다. "왜?" "회사 옆에 주꾸미 잘하는 집이 생겼는데 초고추장 맛이 죽여줘." "... 근데?" "나와서 점심이나 사라." 그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렇게 방만하다. 그러나 고지식한 나는 그런 쟁정하고 뻔뻔그러운 위로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뭐야, 지금? 나는 심각해서 죽겠는데 말 몇마디 해주고 결국 점심 한 끼 해결하자는 거였어?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야, 인간이니까 그런 거지. 인간이 뭐 대단한 건 줄 알아? 오디세우스 도 사랑하는 부하들이 다 죽었는데도 밥부터 먹었고, 배가 부르니까 그제 야 눈물이 나왔다잖아." 내가 늘 작은 일에 상처를 받는 것이 예민함보다는 진지함 탓임을 잘 알 고 있는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너도 이제 인생에 대해 서정적 태도를 버릴 나이가 안 됐던가? 나의 진지함은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도인 여섯 살때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 나는 나 자신이 인격자로 인정받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 다. 바로 전날까지 코흘리게 어린애였던 나는 그날도 전날의 연속인줄로만 알고 식구들이 아침 밥상을 물린 뒤까지도 철없이 자고 있었다. 그러나 전 날과 달리 부모님은 나를 째우거나 꾸중을 하지 않았다. "아무개는 아직도 자니?" "놔두세요, 내년이면 학교 갈 애인데 제가 다 알아서 할 거예요." 라는 대화로 나의 각성을 촉구할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차마 눈을 번쩍 뜨지는 못했지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 어른이란 이렇게 갑자기 되 는 거구나. 그때부터 세수하면서 목을 안 씻었다고 도로 우물가로 쫓아내고 밥을 흘 리면서 먹는다고 야단치는 일도 없어졌다. 말끝마다 "차암, 너도 이제 어 른이지?"하면서 철없어도 되는 어린애로서의 권능을 완전히 박탈했다. 그 것이 교육학자들이 <책임이론>이라는 용어로 정리한 바 있는, 아이들을 일 찍 철들게 하기 위한 어른들의 획책임을 알 리 없는 나는 죄의식에 빠졌 다.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나를 과분하 게 평가하고 믿어주시는 순진한 부모님들! 당시로서는 배운 게 별로 없는 나는 고지식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실망 시키지 않기 위해 다소 부족하나마 어른 행세를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 다. 나는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말하고, 삶이 별 것 아님을 이해하는 데에 안간힘을 바쳐야 했다. 입학 적령에서 한 살이 모자란 데다 생일도 10월 말인 나는 정식으로 초 등학교에 입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손을 써서, 며칠 뒤 운동장을 가 로지르는 아이들의 대오에 헐떡거리며 끼여들어 같이 뛰면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그때부터 나는 언제나 친구들보다 한 살이 어렸다. 병도 앓지 않 고 재수도 하지 않고 군대도 가지 않은 내가 박사과정 시험에 응시했을 때 는 (비록 떨어졌지만) 장하게도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나는 내가 조숙하 다는 것을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내 인생의 비밀 중에 비 밀인 그 사실을 누구한테나 은근히 털어놓았다. 진지한 조숙 속에 지금 내 머리통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원형탈모의 땜통처럼 속이 내다보이고 우 스꽝스러운 빈터가 있음을 알 턱이 없었다. 아버지는 달변과 과묵과 독설을 삼분의 일씩 나누어 가진 분이었다. 말 썽쟁이 소년 시절 전기 실험을 하겠다고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끊는 바 람에 온 읍내를 암흑천지로 만들었다는 아버지는 사업을 하는 대에도 그 아이디어와 개척정신을 살려서 이층 건물에 초가지붕을 얹는다든지 하는 신선한 발상 및 근성으로 변변한 자본 없이 토건회사를 일으킨 청년 사업 가였다. 읍내의 아스팔트 포장을 하고 경찰서와 군청을 짓는 건설의 역군 으로서 감사패를 받는 모습이 종종 지방 신문과 군청 게시판에 실리곤 했 다. 하청업자인지라 갱 영화에나 등장하는 <청부업자>라는 무시무시한 직 함으로 불렸지만 기타로 뽕짝 반주를 애절하게 뜯는가 하면 <러브 이즈 매 니 스프렌더드 싱>이나 <새드 무비>를 잘 불렀고 북도 잘 치는 낭만적인 <한량>이었다. 또 직접 사용하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아버지의 책상에는 측량기구와 설계도, T자 같은 멋진 물건들이 갖춰져 있었다. 텔레비젼도 동네에서 가장 먼저 샀다. 늘 바빳지만 아비지는 나와 동생에게는 언제나 자상하고 멋진 아버지로 인식되고 싶어했다. 특히 내게는 전혀 야단을 치는 일이 없었다. 공부 잘 하라는 꾸지람도 <아빠는 초등학교 6년 동안 시험에서 틀린 것이라고는 한 개뿐인데 그것도 1학년 때 받아쓰기에서 군밤을 구운 밤으로 잘못 써 실수 한 것이다>라는 말씀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일로 대신했다. 그러고는 마지 막에는 늘 <우리 아무개는 아빠의 자존심이다> <인간은 자존심으로 산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너는 고개 숙이는 벼가 되어라> 등 소중 한 인생의 금언을 곁들인 인격적 대화로써 나를 감복시키는 것이다.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변두리의 싼 땅을 사서 이층 양옥집 을 지었다. 커다란 당산나무를 중심으로 이엉이 썩어가는 초가집이 몰려 있고 아이들이 아랫도리를 벗고 돌아다니는 가난한 동네에 처음 생기는 양 옥이었다. 모름지기 아이들은 뜨는 해를 바라보며 자라야한다는 아버지의 소신에 따라 우리 방의 창을 남향으로 냈고 입식 부엌과 지하실까지 만들 었다. 마당에는 장미꽃 칠십 그루를 심고 이층에는 널찍한 서재와 가족 휴 게실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동네 아이들은 우리가 부자라고 생각했다. 아마 우리 집 마당에 우람한 덤프트럭이 하천 모래 따위를 가득 싣고 물을 질질 흘리며 들락거리고 또 조그마한 토막만 가져가도 엿장수가 입이 찢어 질 만큼 엿을 듬뿍 주는 철근이 엄청나게 긴 똬리를 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절대 부자가 아니며 아버지의 말 가운데 믿지 못할 말이 반이상 이라고 생각하는 회의론자 가운데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있었다. 선운사나 내장사에 놀러가자고 해서 온 식구가 소풍 준비를 다 해놓고 아버지만 기 다리고 있다가 결국 밤이 으슥해져서 찬합을 풀고 그것을 저녁 대신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는 것이다. 변산 옆의 채석장에 놀러갔을 때 카메라를 멘 아버지가 사진을 찍게 그늘에서 나오라고 몇번이 나 채근하자 외할머니는 혼자말을 하셨다. 그놈의 사진, 찍기만 하면 나오 는 걸 당최 못 봤어.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버지가 바쁘다는 것은 제대로 이해할 만한 어른은 세상에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나는 5년 후까지 결국 집은 제대로 꼴을 갖추지 못했 다. 겉을 봐서는 이층 양옥이었지만 일층에 방 세 개와 마루와 부엌만 내 장이 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그냥 골조와 베니어판이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인데 이해 못할 게 없지 않은 가. 인생이 어디 다 계획대로 되는 것인가. 언젠가 나는 유네스코라는, 이국적인 이름으로 보아 보나마나 훌륭한 일만 도맡아 할 게 분명한 단체로부터 상을 받게 되었다. <유네스코 주최 어린이 미술전을 보고>라는 감상문 모집에서 2등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 미술전이 열리는 전주에 가지 않았으므로 미술전을 보았을 리는 없었다. 그 미술전의 팸플릿을 보았다는 미술반 선생님의 막연한 설명만 듣고 지은 감상문이었다. 주최측인 유네스코에서 <학생과 지도교사는 전주에 올라와 시상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선생님은 나를 크게 칭찬했다. 보지도 않은 미술전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하게 하고, 그 거짓말로 상을 받게 되었 는데 정직하지 않다고 꾸중하기는켜녕 학교의 명예를 드높였다고 칭찬을 하는 어른들에게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나도 그런 어른 중의 하나였 기 때문이다. 오히려 <글이란 게 결국은 다 지어낸 거짓말 아니던가>라고 합리화함으로써 한 단계 앞서갈 정도였다. 나는 어른스럽다 못해 조금은 타락하기까지 했다. 백일장에서 상을 탄 날이었다. 아버지는 사업상 <조양관> <관수정> 같은 <관>에 자주 드나들었 는데 그날 기분이 좋은 나머지 지도선생님과 교감선생님, 그리고 나까지를 <관>으로 모셨다. 기생들이 나와서 <미스 아무개>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아버지는 앞자리에 앉은 기생의 성을 번번이 기억 못했다. 선생님들과 한 참 얘기를 주고받다가 옆자리를 돌아보며 "참, 뭐라고 했지? 미스 정인가 강인가" 하곤 했다. 내가 참다 못해 "아빠, 미스 장이라니까" 라고 말해주 었다. 좌중에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교육상 좋지 않은 분위기임을 불현듯 실감한 아버지와 선생님이 무안함과 후회를 감추려고 부러 웃음소리를 호 방하게 내는 것도 모르고 나는 어른의 타락한 세계에서 당당히 어깨를 마 주한 게 만족스러워 함께 소리높여 웃었다. 내게도 삶의 진실을 깨치게 해줄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업이 커 지면서 바빠진 부모님 대신 내게 맹목적인 가족애를 가르쳐준 외할머니가 매일 대야에 초록색 물을 하나 가득 토해내며 암으로 죽어갈 때, 내 고자 질에 상처를 입은 남동생이 가출했을 때, 아니면 구둣발로 안방까지 들어 온 남자들이 장롱과 텔레비젼에 빨간 도장이 찍힌 딱지를 붙이고 가던날, 그날 나는 언제나 <간조>날이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한방중에 오토바 이를 타고 나타나 가죽 점퍼 안주머니에서 신문지로 싼 돈 뭉치를 척, 소 리가 날 듯이 후련하게 꺼내주는 순간을 기다렸지만 며칠 전 나간 아버지 는 끝내 오지 않았다. 트럭에 짐을 싣고 야반도주하듯 고향을 떠나 뒤, 낯선 도시에서 아버니 는 외지에 나가고 어머니는 앓아누웠던 그 시절, 나는 열다섯 살이었다. 그 나이라면 불행을 느껴도 되고 어쩌면 약간 빗나가도 될 만큼은 문제 의 식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내 방식대로만 진지했다. 현실적인 고생에는 불행하지 않았고 이제는 사춘기가 되었으니만큼 오직 <절대고독> 과 <영혼의 오손>과 <치희의 상흔>과 <세련된 태타>따위로만 고민할 뿐이 었다. 사르트르와 칼 힐티와 토마스 울프를 억지로 읽으며 박계형보다 재 미없다는 불온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치는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곤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용돈을 쪼개 정음사와 을유문고의 전집을 할부로 들여놓은 일로써 인생을 이미 지적인 일에 투자하며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 당연히 그런 나를 웃기게 생각하거나 역겨워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이 라면 나도 마땅히 같은 애를 역겨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그런 친 구들을 의식할 때마다 우수어린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진지함은 내가 계속 삶을 철저히 오해하도록 도왔고 고지직함은 그 오해 를 바꾸지 못하도록 벽을 쌓았다. 나는 스스로를 이지적이고 성숙한 여성 이라고 믿었으며 이따금 나를 순진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 걸로 보아 내가 제법 교활하리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타락을 감추고 세상을 속이는 데 대 해 나는 원초적인 죄의식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때는 성당에 나가 열심히 기도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너무나 진지하게 수행하다가 꽃샘추위 가 살을 에던 날 여대 기숙사의 삼층에 짐을 풀고 열아홉 살의 대학생으로 서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원형탈모가 점점 심해져간다. 동전만하던 땜통이 화장품 병뚜껑 정도로 커졌다. 얼굴의 점은 세어볼수록 많아진다는데 이것도 내가 너무 들여다보 는 바람에 더 커진 것은 아닐까. 그동안 땜통은 나를 번번이 괴롭혔다. 술자리에서 나는 인생이 별거아니 라고 잔뜩 코웃음을 친 다음 냉소를 띠고 술잔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머리 속의 벌건 땜통이 드러났음을 깨닫고 얼른 고개를 젖히곤 했다. 머리 의 땜통을 흔들며 문학을 위해 혼을 불사르겠노라 열변을 토하는 꼴은 또 얼마나 장관일까, 하고 <작가와의 대화>같은 행사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러 웠다. 거지 꼬마들이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며 깔깔거리다가 그 애 들의 머리에서 내 것과 비슷한 땜통을 발견하고는 슬그머니 얼굴이 굳어져 곁눈으로 가족들 표정을 살핀 적도 있었다. 게다가 그런 내가 우스워 웃는 웃음을 참을 때의 우스꽝스러운 기분이란. 또 K에게 전화를 한다. "있잖아. 대학 때 써클 같이 했던 남자한테 전화왔더라." "왜?" "신문에 서 날 봤다고. 좋은 글 많이 쓰래. 다음 주쯤에 만나기로 했어." "뭐하 러?" "모르겠어. 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더라구." "거첨. 별일이네." "그리 고 말야. 나 오늘 김제로 문상 가기로 했는데, 머리 때문에 어떡하지?" "뭐 어때, 레만 호에 떨어진 보름달 같다고 생각할 거야." "장난이 아니란 말야. 머리 이래갖고 사람 많이 모이는 데 가도 될까?" "누가 니 머리통만 보냐?" "잘 보이고 싶은 남자도 몇 명 있다구. 땜통 때문에 이쁜 척할 수 도 없잖아." "그건 그래. 내가 봐도 그건 영 안 되겠더라. 그럼 가지 말든 가." "안 돼. 안 가면 인사가 아니야." "그럼 가" "누가 가기 싫어서 그러 나? 머리 때문에 그러지." "그럼 안 가면 되잖아." "그렇게 간단한 게 아 니래도." "뭐가 복잡하다는 거야. 가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야. 나 지금 바빠. 끊어." "뭐? 자기 일 아니라 이거지?" "바빠서 바쁘다고 말하는데 애들같이 자기 일 남의 일은 또 뭐야?" "암튼 못됐어." "못됐다구?" "아니 잘 됐어!" 내가 먼저 끊어려는데 전화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다시 전화 기룰 귀에 갖다댄다. 정 마음에 걸리면 미장원에라도 가보든지. 나는 볼멘 소리로 대꾸한다. 나도 바쁘니까 끊어! 이곳이 바로 미장원이라는 말은 하 지 않는다. 미용사가 분무기로 머리에 물을 뿌리다가 호들갑스럽게 놀란다. 어머, 원형탈모신가봐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러게요. 생긴 지 한참 됐는데 머리가 날 생각을 안 하네요. 이런 손님들 가끔 있어요. 피부과에는 가보셨어요? 이제 가봐야죠. 시간이 별로 없어서. 무슨 말씀이 세요. 여자는 피부하고 머리카락이 생명인데 아무리 바빠도 그렇죠 몇마디 더 나무란 다음 미용사는 드라이를 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드려요? 머리 빠진 데부터 가려야죠? 어머 자세히 보니 더 크다. 손님, 빨리 피부과부터 가보세요. 그냥 두면 더 커져요. 미용사가 너무 걱정을 해주는 바람에 미 안해진 나는 되려 그녀를 위로하듯 한마디 한다. 핀을 잘 꽂으면 안 보일 때도 있어요. 드라이를 마친 미용사가 헤어 스프레이를 가져온다. 헤어 스프레이를 뿌 리면 머리가 빳빳하게 엉키므로 분명 땜통이 더 크게 드러날 것 같다. 나 는 한껏 조심스럽게 미용사에게 내 견해를 말해본다. 미용사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 아녜요. 스프레이로 딱 붙여서 고정시키는게 나아요. 미용 사가 지금까지 보여준 애정을 배신할 수 없는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 의 의견에 따른다. 문상 떠날 대절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대학로. 내가 다가가자 버스 앞에 서 있던 몇사람이 알은척을 한다. 다행히 머리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 지 않는 눈치다. 버스에 올라탄 나는 정수리 왼쪽에 있는 땜통을 조금이라 도 덜 보이려고 왼쪽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 았으면 싶다. 그러나 눈치 빠르고 자상한 A가 나를 자기 자리로 부른다. 어디 머리 좀 봐요. 우리 마누라도 전에 이랬는데 곧 낫더라구. 나는 당장 손을 올려 가리고 싶었지만 그곳이 치부임을 그렇게 노골적으로 인정할 배 짱은 없었기에 오히려 명랑하게 대꾸한다. 그랬어요? 그럼 불치병은 아닌 게 확실하네? 그런 다음에는 이런 때 얼굴이라도 묽어져 있으면 민망하다 싶어서 짐짓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옆자리에 앉은 B에게 나는 땜통 얘기를 꺼낸다. 숨기지 못할 바에야 조 금 더 뻔뻔스럽게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다. B는 이마를 찡그리며, 걱정 되겠어요. 아프진 않아요? 하고 말해준다. 나는 하하, 낫겠죠 뭐, 하는데 순간 겨드랑이에서 땀 한 줄기가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헤어 스프레이를 하지 말았어야 한다. 아마 그랬어도 미용사는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을 것 이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오면 언제나 친구들에게 이런 전화를 한다. 아이고, 아무개야. 나 지금 금방 도착해서 엉덩이 붙이자마 자 너한테 전화부터 하는 참이다. 터미널에서 하려고 했는데 동전이 없어 서 말야, 마침 전화카드도 없지 뭐냐. 카드 파는 데는 다 문을 닫았고. 야 구르트라도 사서 잔돈을 바꾸려고 하는데 우리 딸 그것이 나 데리러 나왔 다가 주차비 많이 나온다고 어찌나 잔소리를 하는지 그냥 와버렸어. 나 금 방 도착해서 지금 신발도 한쪽밖에 안 벗었단다... 서울 온 지 사흘이 지 나나 열흘이 지나나, 그리고 그 친구가 경자든 말자든 경순이든 금방 도착 했다는 어머니의 말은 언제나 똑같다. 듣다 못한 내가, 엄아, 뭐 그런 일 로 나까지 팔아가면서 그렇게 신경을 써요? 그분들은 엄마가 서울 도착하 자마자 전화 안 했다고 실망하지 않아. 엄마 전화만 기다리느라고 전화통 앞에 ㅈ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나 어머니는 요즘도 여전히 똑같은 전 화를 한다. 그런 어머니에게 신경질을 내려다가 나는 내가 왜 그 모습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이유를 깨닫고 씁쓸히 웃곤 한다. 버스가 상가에 도착한 것은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이다. 빈소에 절을 하 고 저녁상을 겸한 술상 앞에 얹았을 때 나는 단단히 긴장한다. 술자리의 의기투합을 경계하자. 오늘만은 사해동포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땜통 을 허옇게 드러낸 채 술잔을 치켜들고 거나하게 떠들어 대는 여자가 있다 면 이 자리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잊지 못할 강렬한 인상을 남기겠 는가. 나는 하나뿐인 여자 동료인 B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입속으로 연습 한다. 저요, 술 별로 못 마셔요. 저요, 이 잔 그냥 받아만 둘게요. 그런데 저쪽 자리에서 누군가가 건너오더니 내게 술을 권한다. 나 전주 사는 아무개요. 어머, 안녕하세요, 저도 전주에서 고등학교 나왔어요. 나 는 동창회에도 한번 나가지 않는 고등학교를 들먹인다. 고향이나 출신학교 로 편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상냥함은 진지함의 한 변형인 것이다. 그래요? 나는 고등학교 오십이회인데. 그러세요? 저는 그 여고 사 십팔회예요. 그것이 그밤의 시작이었다. 선배가 권하는데 술을 안 마시겠다고 쭝뿔나게 구는 것은 여간 송구스러 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나한테 내숭이 있다고 볼까봐 두려워진다. 초등학 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내 통지표에 이렇게 썼다. <온순하고 극히 여성 적이며... > 여덟 살 때 나는 극히 여성적이었던 것이다. <어른스럽다>는 것과 함께 <여성답다>는 평판은 나를 진지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형탈모> 였다. 나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기 시작한다. 누군가 인생이나 문학, 혹 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끼여들어 한마디씩 거들고 논평을 하기 시작 한다. 인물평에는 특히 적극적이다. C씨가 잘생겼다구요? 그게 뭐 잘생긴 거예요? 순 소녀 취향이지. 소녀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 거예요. 총각 선생 님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존경하는 철부지 소녀가 있는가 하면 자기가 나 이 들어가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딱한 늙은 소녀도 있어요. 그런 소 녀들은 미소년을 좋아하죠. 만약 C씨가 그런 각종 소녀들의 환호성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한 사람이었다면 그저 그런 바람둥이가 되었을 거고 인생은 그럭저럭 평화로웠겠죠.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는 훨씬 짓궂고 복잡한 거예요. 삶은 C씨에게 소녀의 환호성을 의식할 만큼의 자기 도취도 주었지만 한편 그것을 대단찮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것으로만 자기 의 존재 증명이 되는 것을 경멸하도록 약간의 자의식도 주었단 말예요. 그 는 보통은 자기의 미모를 의식하지만 미모가 사람의 완성을 보장해주지 않 는 것을 알고 있는 정도의 통찰을 가진 집단 속에서는 자신의 미모를 불편 해할 줄도 알지요. 그러나 속마음은 또 안 그럴걸요. 그는 자기에게 환호 하는 소녀들의 머릿속이 함량 미달인 것과 그들의 환호성이 자기의 본질성 과 별 관련이 없는 이미지에 의한 것임을 알지만 어쩐지 그 환호성이 없이 는 허전하게 되어버렸거든요. 소녀의 환호를 받는 다른 미소년, 혹은 우상 을 질투하기까지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O씨를 바난 할 수 있나요? 인간이 란 불완전한 존재잖아요. 누구에게나 약점과 흉은 있는 거죠. 저도 사실 c 씨를 좋아해요. 저도 소녀 취향인 가봐요. 근데 참, 저만 너무 길게 말했 나요? 내게 오는 술잔은 자꾸 많아진다. 술이 들어갈수록 나는 사람들이 참 친 절하다고 생각하다. 열변을 할 때마다 땜통이 끄덕끄덕 흔들리고 다들 그 걸 보며 웃음을 참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나의 소녀시대는 꽤 길었다. 열아홉 살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기숙사에 들었던 첫날, 같은 방 식구인 2학년의 뒤를 따라 식당에 간 나 는 난생 처음 식판이라는 데에 밥을 먹었다. 2학년이 높은 목소리로 반찬 타막을 했다. 이 정구지 쫌 바라. 꺼시만쿠로 에ㅂ다야. 그녀의 젓가락은 부추나물을 헤집고 있었다. 내가 자란 전라도에서<솔>이라고 한껏 점잖게 부르는 부추를 경상도에서는 테니스 코트처럼 발랄하게 부르는 모양이었 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다르구나. 이제 나는 혼자서 새로운 생활을 배워 나가야 한다. 나는 낯선 생활에 대한 불안과 다짐을 삭이기 위해 숨을 들 이쉬었다. 그때 2학년의 친구 하나가 식판을 들고 엎에 와 앉더니 나를 보 고 쿡 웃었다. 너거 방 일랑년이가? 어, 착하게 생겼제. 그래, 일랑년이라 고 얼굴에 써가 다니네. 하더니 자기들끼리 귀엣말을 하고는 다시 킥킥거 리는 것이었다. 방으로 돌아와서 2학년이 말했다. 니, 그 알라같은 머리삔 좀 뺄 수 없나? 인자 막 가아가 일랑년들 미팅 주선할라 하는데 니보고 중 학생 같다고 끼줄 건지 말 건지 갈등 생긴다 안 하나. 나는 얼굴을 붉히며 핀을 뺐다. 촌티를 벗으려면 퍼머부터 하라는 등 파트너에게 <쫄리지 안 하고 소치지 안 하려면> 반드시 굽이 높은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등 미팅 때의 옷차림에 대해 한참 동안 충고를 늘어놓고 2 학년이 방에서 나가 뒤 거울 앞에서 다시 핀을 꽂아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핀을 꽂는 편이 깜찍해 보였다. 드디어 미팅을 하는 날 <숙 다방>의 계단 을 올라가며 얼른 주머니에서 핀을 꺼내 머리 양쪽에 꽂았음은 물론이다. 내 파트너는 검은 남방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고 구석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서울 남학생이었다. 흰 얼굴과 시니컬한 말투, 반항적인 표정, 고2 때 휴학을 하고 보컬그룹을 만든 적도 있다는 그가 종 로통에서 재수를 할 때도 수업 팽개치고 파고다 아케이드에 가서 악기 구 경을 하는 것이 더 좋았다고 말할 때 나는 기껏 두 살 많은 그에게서 엄청 난 인생의 방황과 깊이를 느꼈다. 그가 말했다. 어제는 말예요. 학교 잔디 밭에 누워 있다가 강의에 안 들어갔어요. 왜요? 하늘이 너무 파랗더ㄱ라구 요.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내가 대학생활에서 발견한 문제점이라 고는 학교에 오면 뭘 어떻게 하라고 일일이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였다. 왜 조회와 종례가 없는 것인지 불편했다. 그러니 대학 강의를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을 멋있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고등학교 때의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각별한 이해심을 갖고 들어주었다. 그에게 걸맞는 여성으로서의 성숙함과 지적 길이를 보여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애프터를 신천하지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 했던 나는 그가, 내일 전화해도 돼요? 하고 묻자 이마를 약간 찡그리며, 뭐, 그러세요,라고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탁자 밑에서 떨리는 두 손을 힘껏 맞잡았다. 49국 7079. 그가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전네줄 때에는 먼저 땀 이 밴 손바닥을 창바지에 문질러야 했다. 애프터는 1주일 뒤였다. 모자가 달린 토끼 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나는 또 머리핀으로 모양을 냈다. 그는 30분이나 늦게 왔다. 그는 미안해하며 미티을 하느라고 늦었는데 억지로 한 미팅이라고 해명을 했다. 이해심이 많은 내가, 미팅을 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나와 미팅을 한 느낌이 좋아 서 미팅을 또 한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또 미팅을 한 것은 나를 좋아한다 는 뜻이다.라고 말해주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를 만족시켰다는 사실이 대견해서 나도 따라 웃었다. 나의 안타까움은 그가 너무 어둡다는 데 있었다. 결핏하면 휴학하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자기는 변두리 술집에서 드럼을 두드리다 마감했어야 할 인 생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얼굴도 점점 더 창백해지는 것 같았다. 매일 밤 헤드폰을 끼고 듣는다는 딥퍼플의 <솔저 오브 포츈>을 빼고도 그 가 좋아하는 음악은 죄다 <에피타프> <에이스 오브 소로우>처럼 음산하거 나 우울한 곡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이따금 한숨이 나왔다. 왜 나를 통 해서 인생의 기쁨을 찾으려 하지 않는지. 스스로 구원이 여성으로서의 태 세를 완전히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그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기숙사 생활이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365일 내내 도마에 올리고도 남을 만큼 사람이 많다는 점이다. 1학년 중에는 누가 제일 예쁘다. 2학년 중에 는 누구다. 근데 누구는 청강생으로 들어왔고 누구는 남자관계가 복잡하 다. 매일같이 아홉시 점호시간 직전에야 헬레벌떡 뛰어들어 오는데 바래다 주는 남자가 늘 바뀐다 등등. 세련되고 머리 나쁘고 끼 많다고 꼽히는 1학 년 중에 혜란이라는 애가 있었다. 혜란은 나를 기숙사에 바래다주고 돌아 가는 그를 본 다음부터, 내 파트너가 멋있는 걸로 보아 친구도 괜찮겠다며 소개팅을 주선하면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를 위한 기분 전환이 될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 일을 적극 추진했다. 더블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혜란은 달랑거리는 귀고리를 달고 목이 패 인 티셔츠에 스카프를 했으며 펄시스터즈 같은 판탈롱 바지를 입었다. 팔 에는 청카바지가 걸쳤다. 나는 약간 불안해져서 블라우스에 달린 분홍색 리본을 몇번이나 바로 잡았지만 혜란이같이 경박한 애에게 주눅들 것은 없 다고 생각했다. 우리 두 쌍은 <지지배배>라는 경양식집의 붉은 등 아래 마 주앉았다. 웨이터가 오자 나는 언제나처럼 주스를 주문했다. 그러나 혜란 은 노블 와인을 시켰다. 혜란은 계속 노숙하게 굴었다. 화제도 주로 남녀 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이끌어갔고 간간이 콧소리와 웃음을 섞을 줄도 알았다. 남자 둘의 시선은 혜란에게만 쏠렸다. 나를 상대해준는 것은 그들 셋이 함께 건배를 하면서 형식적으로 내 주스잔을 거드릴 때뿐이었다. 혜란의 제안으로 족므 후에는 팔씨름이 시작되었다. 혜란은 제 파트너의 손목을 살짝 잡더니 <아야야!> 하면서 어이없이 싱겁게 져버렸다. 반면 나 는 얼굴까지 벌게져가며 있는 힘을 다해 아슬아슬한 접전을 벌였는데, 내 가 너무나 열심히 하는 설 보고 파트너가 슬며시 힘을 빼주어서 결국 그의 손등을 바닥에 메꽂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두들 그 승리를 장하게 여기 기는커녕 웃음을 참는 누치여서 나는 여간 억울한 게 아니었다. 그때부터 나는 등받이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나는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왜, 재미없어요? 그럼 우리, 성냥개비 수수께 끼 해볼래요? 그럼 그렇지, 나는 그가 나를 배려하는 데에 조금 마음이 풀 려 탁자 쪽으로 몸을 숙인 채 그의 희고 신 손가락이 성냥개비를 이리저리 늘어놓는 것을, 무슨 문제가 나올지 너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성심 성의껏 쳐다보았다. 그는 성냥개비로 도형을 만드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앞에 놓았던 것을 다시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몇번이나 도형을 고쳤다. 수 수께끼 문제가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라 나는 안타까워하며 응원의 뜻으 로 더욱 얼굴을 탁자에 바짝 가져다가 집중하는 모양을 보였다. 이윽고 고 개를 번쩍 든 그가 내게 내게 말했다. 하, 참! 얼굴 좀 처리 치워봐요. 콧 김 때문에 성냥이 자꾸 흩어지잖아요. 기숙사 점호시간에 가까워졌으므로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삼강 분식> 앞을 지나가다가 그가 말해다. 이대로 들어가면 저녁 굶을 텐데 뭘 좀 먹 고 가죠. 분식집에 들어가자 혜란은 제멋대로 내 것까지 포함하여 유부국 수 네 그릇을 시켰다. 다 먹고 나서 입을 닦는데 혜란의 파트너가 내 얼굴 을 똑바로 보며 놀리듯 말했다. 거기, 앞니에 고춧가루 큰 거 꼈어요. 거 울 좀 보세요. 순간 나는 당황했다. 부산애인 혜란이가 어색한 서울 억양 으로 거들었다. 정말이야. 얘, 그걸 어떻게 알아? 재미있어 죽겠다는 혜란 의 목소리. 나는 국수그릇을 가리키며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여기 고춧가 루가 없는데 어떻게 이 사이에 고cnt가루가 들어간다는 거야? 다음 순간 그들 셋은 웃음을 떠트렸다. 너 머리 좋다 얘. 혜란의 말에 그가 뭐라고 동의하는 말을 던졌지만 재 귀에는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남자를 이해하는 일에는 얼마든지 가진 재능과 시간을 동 원하는, 진지함이라는 이름의 순정이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그를 이해했다. 그가 나를 우습게 불 리는 없어. 지난달 내가 집에 내려갈 때는 전주에 같이 가주겠다며 자기 집에 들러서 옷까지 갈아입고 나왔었잖아. 기차표를 사지 못해 서울역에서 배웅만 하고 돌아갔지만 말야, 그리고 명 동의 <몽셀통통>이다 <오비스 캐빈>이다. 무교동 <약속>이다 좋은 데는 열 심히 데려가고 음악 테이프도 선물하고 나는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신입 생들은 문무대 들어가느라고 머리를 다 깎았다는데 아마 그런 모습을 내게 보이기 싫어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대학생활이 석 달이나 지나간 것 을 알았고 불현듯 엄청난 삶의 시련을 겪었음을 때닥게 되었다. 하지만 실연을 괴로워할 시간은 그닥 없었다. 바빠졌기 때문이다. 고내 신문사에 들어간 나는 총장 퇴진 운동이다 뭐다 멋모르고 어깨에 힘을 주 느라고 바빴고 잔디밭에 앉아서 <이 어두운 시대에 문학을 하겠다는 일이 나약한 선택이 아니겠는가>라며 주제넘은 백수의 탄식을 하느라 바빴고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스터디하느라 바빴고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그모임에서 빠질까 궁리 하느라고 바빴고 그런 틈틈 이 미팅을 하느라고 바빴던 것이다. 바쁜 내가 다시 나의 진지함의 돛을 연애풍 쪽으로 돌린 것은 그해 가을 이었다. 상대는 애향심을 빌미로 만나서 독서를 구실로 친목을 도모하는 한 서클에서 알게 된 남학생이었다. 여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게다 가 그것을 자기 스스로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그에게 약간 아니꼬운 마음 을 품었던 것이 그에 대한 첫 관심이었다. 그는 그대로 자기가 <난여자에 대한 원칙이 뚜렷해요. 첫째 명랑, 둘째 솔직, 셋째 겸선... > 하는데 내 가 넷째까지 듣자마자 "뭐야, 그럼 나잖아?"라고 말하는 걸 보고는 마음속 으로 <저런 발칙한... > 하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와 나는 얼마 후 비밀 데이트를 시작했다. 우리의 만남이 비밀스러웠던 것 은 순전히 남자 쪽 사정이었다. 눈에 띄는 수려한 용모와 총명으로 고등학 교 때 이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전력을 가진 그가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에 오르내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함께 본 날 그는 <인간과 자유>에 대한 철학적인 식견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경북궁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는 흔 히 T는 말이지만 미처 어원까지는 몰랐던 <미중유>, 그리고 제갈공명이 큰 뜻을 위해서 사사로운 정을 버렸다는 <읍참마속>의 고사 같은 것을 들려주 기도 했다. 그렇게 똑똑하고 포부가 큰 사람이 고등학생 때 소설까지 썼다 는 말을 듣고 나는 그의 다양한 재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서클 모임에 가서는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를 행해, 저는 [사람의 아들]에 대한 아무개씨 의견이 지나친 독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 쩌고 해가면서 시티미를 떼고 독서토론을 해야했다. 점점 그의 에매한 태도에 불만이 쌓여갔다. 나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고 싶었고 또 당현히 그것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 에서 서클 여학생 하나가 그에 대한 연정을 주체하지 못해 내게 상담을 해 온 일도 손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자관계를 둘러싼 소문과는 달리 그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 혹 은 성의 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덤덤한 성격이었다. 한번 만나면 몇시 간이 지나도록 한자리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일어날 때는 다리가 펴지지 않 아 한참 주물러줘야 했다. 규칙적으로 내게 전화를 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친절했지만 나는 뭔가고 부족했다. 나는 열아홉 살이었고 지금 첫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몇 달째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고 바래다주는 일 만 되풀이될 뿐 달콤하다거나 애틋한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용기를 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모르겠어요. 내가 아무개씨의 서클 동료인 지 여자친구인지 데이트 상대인지 아니면 애인인지. 그는 문어체로 건조하 게 대답했다. 만약 내가 그 결정에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마지막 번 호에 표를 했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한 2주일 만에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1주일 두어 번씩 만나도 가까워 지지 않는다 싶었는데 오랜만에 만나니 더욱 서먹했다. 그가 무슨 얘기인 가를 했다. 그러나 <세실 다방>의 음악이 너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 다.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는 그 시끄러운 음악은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 래였다. 나는 웃으며 그 노래 제목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뭐라구요? 시끄 러워서 안 들려요! 눈으로 말해요,라구요! 네? 이 노래 말예요, 권태수의 [눈으로 말해요]예요. 무슨 말 하는 거예요? 내 말 안 들려요? 안들리는데 요!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사태를 수습하는 데 보다 적극적인 내가 다시 입 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제길 되게 시 끄럽네,라고 혼자말을 하더니 짜증을 참는 얼굴로 찻잔만 노려보았다. 우 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조금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로 나오서 도 그는 말이 없었다. 그의 예민함에 나도 약간 피로를 느꼈다. <숲새>라는 경양식집에서 돈까스를 다 먹는 동안에도 그는 별로 말이 없 었다. 웨이터가 접시를 치우자 담배를 피워물며 그가 무겁게 입을 땠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스피커에서는 [스프링 섬머 윈터 앤 폴]이 터져나왔 다. 그는 서로에세 인연이 있다면 만난 것이 우연이듯이 또 언젠가는 우연 히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이 멋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이 해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갖지 않는 대범한 모습을 보 여주기 위해서 더욱 명랑하게 떠들고 팝송의 제목을 아는 체하고, 그가 기 숙사까지 바래다주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의 수를 맞춰모기까지 했 다. 밤엔 룸메이트와 함께 [오텀 리브스]란 명화극장을 보며 울었다. 약 사흘 동안 나는 살기가 싫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더 새디스트 씽] 과 [디 앤드 오브 더 월드]만 들었다. 이따금 일어나서 창밖을 보며 중얼 거리기도 했다. 왜 저 새들은 여전히 노래부르고 있을까.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다행히 사흘 뒤에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를 보내고 나서 포장마차에 가봤지만 취하지 않았고 강바람을 쐬도 시원찮더라는 내 용이었다. 물론 우리는 다시 만났고 제법 다정한 사이가 되었다. 손도 잡 았다. 기숙사 앞 공원에서였다. 그날 내 19세 일기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 과 같다. 어두운 허공에 기댄 그의 얼굴은 조금 허전했다. 그가 담배를 피워 물었 다. 남자가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은 언제나 보기 좋다. 더 구나 두 손을 모아 얼굴 가까이 붉은빛을 쥘 때면 난 꼭 그 사람이 이 지 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곤 한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아직 타고 있는 성냥을 발밑으로 던졌다. 난 남자들이 담배를 붙이고 나서 성냥을 미련없이 버릴 때 배신감을 느껴요. 내가 말하 자 그는 가볍게 웃었다. 그의 담배가 타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그네에 몸을 기대고 나란히 하늘을 보았다. 한 개비의 담배가 재로 바뀌는 시간 동안, 자못 별인 듯 서로를 조용하게 의식하는 그 순간이 나는 조금 행복했다. 담배를 거칠게 비벼 끄며 그가 <갑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네>하고 대 답하련던 내 목소리가 목에서 얼어붙었다. 갑자기 그가 내 손을 잡은 것이 다. <난 세상에서 손처럼 예민한 게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솔직하자면 <손처럼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게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써야 했다. 멋부려서 쓴 문장일 분 사실 나는 너무나 거북해서 기숙사를 향한 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던 것이다. 그 역시 <자못 별인 듯> 조용 히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이 여자와 어떻게 자연스럽게 손을 잡을까 하 는 궁리 때문에 머릿속이 그리 조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겨울이 되면서 우리는 자주 만났지만 고작 손을 잡는다는 것은 빼고는 맨 처음 만났을 때 보다 그다지 진전된 점은 없었다. 이런 식이었다. 그가 전화를 한다. 내일 좀 볼 수 있을까요? 내가 대답한다. ...뭐, 그러죠. 그 가 사려깊고 예의바르게 말한다. 아니 뭘, 무리해서 그러지는 말고요. 나 는 웃으며 <무리 안 해요>라고 대답하고, 그러면 그는 <알았어요. 다시 전 화할게요>라고 끊는다. 나는 끊어진 전화통에 대고 소리친다. 내 참, 좋아 하는 사람을 안 만나는 게 무리면 무리지, 만나는 게 어떻게 무리가 되냔 말이다. 눈이 많이 오던 날 우리는 서울역 앞을 걷고 있었다. 길이 미끄러워서 나는 몇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엉금엉금 걸음을 옮기며 한사코 입을 앙다 물었지만 한번은 어어어, 하며 두 팔을 내젓다가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에 야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십 분쯤 그렇게 사투를 벌였더니 도저 히 못 보겠던지 겨우 그가 이렇게 한마디 했다. 괜찮다면, 내 팔을 잡아도 좋습니다.라고 어찌 됐든 팔을 끼는 바람에 부쩍 가깝게 느껴서인지 그날 그는 백화점 에서 내게 장갑을 사주었다. 우리 둘이 너무나 어색했으므로 판매원 아가 씨는 장갑을 골라주고 포장을 하는 내내 한 손으로 웃는 입을 가리고 있었 다. 물론 나는 그 겨울이 다 가도록 털실로 된 그 손가락 장갑을 죽자살자 끼고 다녔다. 우리는 언제나 <랑>자에 불이 꺼져 있는 <명랑 여관> 앞을 지나고 붉은 십자가가 두 개 있는 <복자 교회>앞길로 해서 삼사십 분씩 걷 곤 했다. 아는 사람을 만날까봐 떨어져 걸었지만 좀 어두운 곳에서는 팔짱 을 끼는 일도 있었다. 서로 말을 놓기로 하고서는 십 분이 넘도록 심하게 싸운 사람처럼 한마디 않고 터벅터벅 걷기도 했다. 그 겨울 어쩌면 우리는 더욱 가까워질 수도 있었다. 12월 31일 그 춥던 날. 스무 살이 되기 하루 전날 그때 내가 조금만 덜 진지했어도 말이다. 공원 벤치라는 것이 한겨울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연못 을 끼고 있는 공원이라 바람이 사방에서 몰아쳐 우리의 무릎은 달달 떨렸 다. 망년회다 송년회다 떠들썩한 시내를 두고 그런 을씨년스러운 곳에서 떨고 있는 미욱한 커플은 우리말고는 없었다. 연말 분위기를 내느라 연못 한가운데 있는 전각을 빙 둘러서 작은 등이 달려 있었지만 그저 춥다는 생 각뿐이었다. 그런데도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옆에 있다는 이유만 으로. 아마 나는 또 별이라든지 연못이라든지 아니면 무슨 한 해의 마지막이라 든지에 대해 감상적이고도 진지한 잔소리를 지껄이고 있었을 것이다. 한참 얘기를 하는데 벤치 옆자리의 그가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도 나를 보고 있 었다. 나는, 왜요? 하려다가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천천히 한 손 을 들어 내 뺨을 감싸는 것이 아닌가. 내 몸은 구석구석 갑자기 신경이 바 짝 긴장하며 옴짝달싹 못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경황중 에도 구원의 여성으로서의 내 시문에 대한 자각이 들었다. 체통을 잃어서 는 안 된다. 첫키스 정도에 벌벌 떠는 것은 순진한 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짓 아니던가. 그리하여 나는 긴장을 억누르며 애써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 다. 아무개씨, 이러면 앞으로 어색해서 나 어떻게 보려고 그래요. 거부하 는 게 절대 아니었다. 그냥 나는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뿐 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듣자마자 그가 아 참! 그렇지, 하면서 얼른 손을 내리고 다시 연못 쪽을 향해 고쳐 앉는 걸 보고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그리 고 허전해졌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흐지부지 헤어졌다. 어느 날 헤아려보니까 한 달 가까이 그 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왜 헤어졌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둘 다 고지식하고 진지하고 점잖고 자존심 강해서, 그래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지 못했던 거라고 짐작했지만 어디까 지나 짐작이었다. 후회도 없지 않았다. 운명적인 첫 키스가 이루어지려는 순간 거기 대한 논평을 해가며 잘난 체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 겨울이 지나고 나는 2학년이 되었다. 또 바빠지기 시작했다. 월요일 여섯시를 기다려 텔레비젼 만화영화 [캔디]를 봐야 했고 세종문화회관 앞 의 집회에도 기웃거려야 했고 나와는 별 상관 없는 연고전이니 남의 학교 축제니 실없이 쫓아다녀야 했고 대학합창대회에 대비한 노래 연습도 해야 했고 2년에 걸친 짝사랑도 해야 했고 충청도로 봉사활동 가서 제방도 쌓아 야 했고 손가락 두 개가 없는 선생에게 기타도 배워야 했고 립그로스와 실 크 블라우스를 사러 다녀야 했고 <모제>와 <보케뷸러리 2000>을 배우러 학 원에 다녀야 했고 국문과 친구 여섯 명과 함께 <날빛>이란 모임을 만들어 시를 쓴답시고 몰려다니다가 문집 두권을 내고 또 우리끼리 문학상을 만들 어 내가 받아야 했고 [록키]와 [빠삐용]과 [라 미네즈]와 [취권] 같은 영 화 및 [에쿠우스]와 [돼지꿈]같은 연극을 봐야 했고 논장서적에서 은밀히 노란 표지의 [리얼리즘 인 아우어 타임스]를 사다가 불온한 <학습>을 받아 야 했고 가족들과 밤낚시를 가야 했고 텔레비젼에서 열심히 읽어대는 김대 중 공소장을 들어야 했고 동해와 부산과 제주도를 여행해야 했고 김민기와 조동진과 전영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해변 시인학교에도 가야 했고 휴교령 이 내린 날 맥주 두 잔 반을 마셔야 했고 정독도서관에서 과제물 처리로 여름을 보내야 했고... 이쯤 바쁘다보니 나는 어느덧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 그를 전혀 만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대 가기 전 나 를 찾아왔었다. 그때 그는 말했다. <나한테 아무개씨가 필요 없을 것 같았 어요? 아니에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번 상처를 받았던 사 람이 믿고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말투가 너무 건조했다. 그리고 그때 내게 는 속썩이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콤플렉스 많고 똑똑했던 그 남자는 그와 는 실패한 첫키스를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당시 나에게 중요한 존재였다(1 학년 때 겪은 첫키스의 실패를 설욕할 기회는 어이없게도 4학년이 되어서 야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끝내 그가 적어준 번호로 전화를 하지 못했다. 손색 없는 첫사랑으로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 거기까지가 그와 허락된 인 연일 듯싶었다. 몇 년 후 또 한번 그를 만난 일이 있었다. 서울역 앞 지하 건물의 화장 실 앞에서 우연히. 그때 나는 출장 가는 애인을 서울역으로 배웅나왔던 길 이었다. 애인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누군가, 아무개 씨 아녜요? 해서 쳐다보니 바로 그였다. 유행가 가사에나 있는 일인 줄 알 았는데 정말로 첫사랑과 우연히 재회한 내 가슴은 마구 뛰었다. 애인이 화 장실에서 늦게 나왔으면 싶었고 영원히 안 나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 는 약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우선 볼일을 좀 보고 나와서 얘기하 자>고 말한 다음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교대라도 하듯이 그의 어 깨를 스치며 애인이 나왔다. 그리고 조금 후 그는 나와 함께 서 있는 애인 을 보고 당황했고 내가 어색하게 소개를 하자 그답게 짧고 교양 있는 인사 를 마친 뒤 사라졌다. 일껏 애틋한 마음으로 단 하루 떠나는 출장길을 배 웅나왔던 나는 그날 몇번이나 눈을 흘겨가며 시시콜콜 애인을 트집잡아서 결국 화나게 만들었고 다음 날 돌아오자마자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어야 했 다. 그러고도 세월이 꽤 흘렀다. 내가 그와 함께 겨울을 보낸 것도 20년전의 일이 되었다. 마따금 나는 그를 생각했다. 늦가을 덕수ㄱ 앞을 지나거나 바바리코트를 입은 잘생긴 남자를 보면 그리고 누군가 첫사랑에 대해 물었 을 때, 삶이 고단하고 꾀죄죄해서 쓸쓸할 때와 내가 아주 늙어버렸다는 생 각이 들 때,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이란 구절이 떠오를 때마다. 그때 열아홉 살 때 첫키스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을까,하고 이 나이가 되면 대학생 때 같은 서클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아무런 용건 없이 선뜻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는 걸까. 십몇년 만의 어색한 만남인데. 게다가 머리 속에는 원형탈모로 땜통까지 있으면서... 그러나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나는 불현 듯 깨닫는다. 지금 만날 남자 친구는 내 첫사랑과 친한 친구였다는 것을. 그랬구나. 얼마 기다리지 않아 남자친구가 나타난다. 예전에도 동안이었던 그는 인 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조용한 것인지 냉소적인 것인지 어쨌든 대학생 때는 어딘지 소극적으로 보였는데 나이가 들어서 여유 있는 표정이 되었 다. 내게 던지는 말씨도 활달하다, 야아, 아무개 너는 하나도 안 늙은 것 같다. 더 예뻐졌는데? 안 늙기는 왜 안 늙어. 나는 구구하게 설명한다. 언뜻 봐서 그렇지 자세 히 보면 주름살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젊어 보이는 것은 진짜 안 늙어서 가 아니고 스타일이 그래서일 뿐이야. 나도 정장 같은 것 입으면 제 나이 다 들어 보여. 내가 체격이 작고 정장이 안 어울려 그냥 캐주얼하게 입으 니까 분위기가 그래서 좀 젊어 보이는 거라구. 예뻐지다니, 이 나이에 말 이나 되냐? 그건 있어. 확실한 내 일을 갖고 몰두하다보니까 인생에 좀 자 신감이 생긴 것 같아. 그때부터 남 의식 별로 안 하고 표정도 밝아지고, 그 덕분에 전보다 생기 있어 보이는 걸 거야. 그러고는 제풀에 급히 입을 다문다. 그냥 해본 인사치레일 텐데 무슨 심 각한 사안이라고 이렇게 일일이 분석해가며 진지하게 진실을 규명하고 있 는 것인지! K라면 [안 늙었다구? 그럼 요새 늙는 사람도 있나?] 하거나 [다들 젊어지는데 나만 그대고 안 늙고 멈춰 있어서 큰일이야]라고 간단히 눙칠 것이다. 꼭 k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농담에 적극적으로 응전하는 편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긴 장하면 이처럼 남몰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농담에까지도 정면대결을 하려 드는 것이다. 남자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고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신다. 나는 첫인사에 서의 진지한 대응을 사과하는 뜻으로 계속 농담만 해댄다. 그럭저럭 우리 는 옛친구답게 허물없이 옛날 이야기를 하게 된다. D는 어떻게 됐어? E를 좋아했었잖아. D 그 자식, 군대 가서까지 매일 하루에 한 통씩 E한테 편지 보냈지. E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지만 펜글씨를 아주 잘 쓰게 되어서 덕분 에 군대생활 편하게 마쳤어. 참 F는 어떻게 됐어? 개는 말야. 참, G는? 걔? 그렇게 이어지던 얘기 속에 한 순간 수상한 긴장이 감돈다. 드디어 내 첫사랑의 얘기가 나온 것이다. 외국 나가 있다가 얼마 전에 들어왔어. 좋은 직장에다 집도 강남의 널찍 한 아파트이고 그만하면 출세한 셈이지. 결혼은 어떤 사람하고 했는데? 그 자식이 원래 화려하고 야한 여자를 좋아했잖아. 그래? 좀 뜻밖이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짐작처럼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하지 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아무튼 걔는 목표를 세워놓고 사 는 놈이니까 결혼도 제 인생 설계에 들어맞는 여자하고 했지. 똑똑하고 미 인이야. 돈도 잘 벌고. 그랬었구나 나는 고개까지 끄덕인다. 그리고는 조 금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해본다. 나하고 좀 친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 그가 씩 웃는다. 거기 대해서라면 할말이 있다는 표정이다. "그거야 다 알았지. 그때 나도 충고깨나 했었는데. 그 자식도 고민 많았 어. 아무개가 순진하고 귀엽긴 하지만 말야. 걔는 계획은 그게 아니었거 든. 인물도 그렇고 학벌, 집안도 그저 그렇고, 또 의대 약대도 아닌 국문 과생이었잖아. 한마디로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은 못 주는 조건이라구. 결혼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도 마음에 드니까 만나긴 만났지만 늘 이 럴까 저럴까 하더니 나중에 그러더라. 괜히 감정 키우면 골치 아플 것 같 아서 헤어졌다고. 야, 그때야 아무개가 소설가까지 될 줄 누가 알아겠어?" 그때 나는 첫사랑인 그를 위해서 기꺼이 구원의 여성이 되고자 했다. 그 러나 그는 방황하고 상처 입은 영혼 같은 불필요한 것은 갖고 있지 않았으 므로 서정적인 의미의 구원 따위도 필요 없었다. 그가 원하는 구원의 여성 은 실제적으로 뭔가를 갖춘 여자였다. 열아홉 때, 워낙 진지함으로 무장을 한 탓에 내게는 실연조차 먹혀들지 않았다. 대신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첫사랑의 남자에게 보기좋게 차여 버린 것이다. 나는 20년 동안 지녀온 첫사랑의 순결을 훼손당한 사람치고 뜻밖에 담담 하다 "그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남자가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는지 참 안타까워했는데." 나는 재미있다는 듯 큰 소리로 웃는다.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M 얘기 가 그렇게 되어야 맞는 거였어. 나도 삶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나,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구.> 그 다음부터는 남자친구의 얘기 를 건성으로 들으며 혼자 소설 구상까지 한다. ...남자는 못생기고 순진한 그녀를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완곡하게 따돌리려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채지 못하는 여자는 그의 구원의 여성이 되기를 자처하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켠다. 제목을 쳐본다. <소설 첫사랑>. 그때 불현듯 기억 저편에서 [솔저 오브 포츈]을 좋아했던 남자가 떠오른 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도 그렇게 마르고 검은 셔츠를 즐겨 입 고 입담배를 멋있게 피울까. 보컬그룹을 만들긴 만들었을까. 그 대목에서 나는 갑자기 이맛살을 모은다. 잠깐! 내가 혹 지금까지 첫사랑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지나가 버린 날의 일이라고 해서 의미를 바꾸지 말란 법은 없다. 첫사랑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면 첫사라의 대상은 바뀔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난 다음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선다. 손을 씻고 나서 거울을 본다. 정수리께에 자리잡은 휑한 구멍이 굳이 머 리카락을 들추고 살펴볼 필요도 없이 그대로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거울 앞으로 바짝 한 걸은 다가간다. 불빛을 받아 훤히 드러난 동그란 탈모 자 리를 한참 동안 쳐다본다.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지만 새 소설에 대한 흥미는 이미 사라진 뒤이다. 나는 생각에 잠긴 채 한 글자씩 띄엄띄엄 글자를 쳐간다. 모니터 화면에 문장 몇 개가 나타난다. <인간에게는 다 약점이 있다. 누구에게나 우스꽝 스러워 보이는 점은 있다. 내 탈모증의 환부처럼. 그리고 성숙하지 않고 건너뛴 내 유년처럼.> K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안 바빠? 전화 길게 해도 괜찮겠어?" "응, 상관없어. 무슨 할 얘 기 있냐?" "아니 별건 아니고, 대학 때 알던 서클 남자친구 만나기로 했다 고 했었잖아." "그랬지." "아까 만나고 왔거든." "근데?" "나, 옛날에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나 몰라." "왜?" "남들이 날 우스꽝스럽게 본다는 걸 나만 몰랐어. 혼자만 진지해갖고 말야." "..." "생각해보면 얼마나 푼수 같았는지." "요즘은 안 그렇다고 생각해?" "요즘이야 너무 속을 잘 감춰서 문제지. 푼수같이 안 보이려고 얼마나 긴장을 하는데." "네가 그렇게 생각 하면 됐지 뭐." 나는 K답지 않은 우호적인 대답이 못마땅하다. 갑자기 내 목소리가 커진 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말야. 내 땜통처럼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주제 에 저 혼자만 진지해갖고 설치던 20년 전이나, 그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 에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지금이나 우스운 건 마찬가지야. 나도 알아. 근 데 말야. 그냥 우스운 존재로 살면 그만인데 난 그게 잘 안돼. 왜 그럴 까?" K는 불쑥 말을 돌린다. "너, 어제 보니까 땜통이 더 커졌더라. 근데 사람들은 네가 일부러 드러 내놓고 다니는 줄 알아. 널 냉소적이고 위약적인 여자라고 하더라니까. 네 소설 주인공같이 시건방지고 독하다고 말야." "그게 정말이야?" K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는 웃기 시작한다. 눈물이 나도록 깔깔 웃어 젖힌다. 송화기에 침이 튈가봐 거기에서 입을 조금 뗀 다음 더욱 마음껏 웃는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의자에 앉아서 웃는다. 아아, 너무 웃긴 다. 웃겨. 내가 농담을 좀 안다는 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지? 해설 : 김화영 은희경의 경우, 늘 그렇듯이 <서정시대>라는 제목은 해학적인 의미를 동 시에 담고 있다. 서정시대란 물론 <자전소설>이라는, 제목 위에 붙인 단서 가 짚어보이듯이, 내레이터가 여섯 살에서부터 대학 졸업까지 보낸 인생의 한 시기, 지나치게 <진지했던> 한 시기를 일컫느다. 진지함이란 곧 <인생 에 대한 서정적 태도>를 뜻하며 자의식이라는 거울이 작동되고 있지 않음 을 의미한다. 그러니 내레이터가 그 시기를 <서정시대>라고 이름붙였다는 것은 이미 그가 그 시대 밖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즉 그 시대가 비판적 객체 혹은 대상으로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서정시대를 살고 있는 나와 그 시대 밖에서 바라보는 원형탈모시대의 현재의 <나> 사이의 거리가 바로 그 해학적인 관계의 근거인 동시에 은희 경의 소설을 읽을 때 특이하게 느껴지는 톡 쏘는 맛이다. 그의 날카롭고 스피디하고 해학적인 어조의 문자들은 매순간 독자의 시선을 비끌어매기에 충분하다. <진지함은 내가 계속 삶을 철저히 오해하도록 도왔고 고지삭함 은 그 오해를 바꾸지 못하도록 벽을 쌓았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과거인 사춘기에 대한 지금의 <나>의 진단이다. 그러나 <나>는 먼 과거, 즉 서정 시대에 대해서만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매순간 말 하고 살아가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고 비판하는 나가 철저히 공존한다. <나 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고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리 속의 땜통을 까맣게 잊는다. 누군가 인생이나 문학, 혹 사랑에 대해 말할 때마다 끼여들어 한마디씩 거들고 논평하기 시작한다. 인물평에는 특 히 적극적이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거울 속에서 보고 의식하고 있다. 소설을 쓸 때는 항상 둘이어야 한다. 쓰는 나와 그 글쓰기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나. 그러나 은희경의 경우 <의식하는 나>가 너무 힘이 세져서 성격 파탄의 우려가 없지 않다. 우리 나라의 작가들은 대개 그 우려와 타협하여 중도에서 휴머니스트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어떤 소설가는 그 궁극에까지 밀고 나간다. 가령 [전락]의 카뮈 가 그렇다. 그 궁극의 파탄을 통해서 우리들 모두의 어두운 자화상이 그려 지기도 한다. 그러면 독자는 매우 불쾌해지거나 마음이 어두워진다. 그렇 다고 작가 자신이 행복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그래서 [서정시대]의 <나>는 자조하듯이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말야, 내 땜 통처럼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주제에 저 혼자만 진지해갖고 설치던 20년 전이나, 그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지금이나 우스 운 건 마찬가지야. 나도 알아. 근데 말야. 그냥 우스운 존재로 살면 그만 인데 난 그게 잘 안 돼. 왜 그럴까?> 이런 의미에서 은희경은 우리 소설계 에서 매우 희귀한 해학적 작가다. 그러나 <서정시대>의 거울은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 단편소설에서 거울 저편에 패어 있는 존 재의 어지러운 심연을 조금 더 깊이 드러내보이는 치열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까? 그는 화가 났던가? 지은이 : 이동하 그는 화가 났던가? 그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한 것은 자정이 지나서였고, 도시의 미로를 빠 져나오는 데도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그래서 정작 고속도로를 타기 시작한 때는 밤 한시가 가까웠을 무렵이었다. 심야 버스였던 것이다. 승객은 모두 해야 스무 명이 못 되는 숫자였다. 좌석은 출입구가 있는 오른쪽 창가로 나란히 여섯 개, 그리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왼쪽창가로 두 개씩 일곱 줄, 도합 서른 개였다. 자리가 남아돌았으므로 뒤쪽은 거의 비 어 있었다. 승객들은 등받이를 적당히 젖혀 상체를 편안하게 누인 자세로 대부분 눈을 지그시 감은 채였다. 종점까지는 고단한 밤이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비디오는 아예 켜지 않았고, 조명등도 낮추었다. 잠을 청해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진작부터 코를 고는 사람도 여럿이 었다.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내비치는 불빛이 승객들의 피곤한 이마를 푸 르스름한 색조로 물둘이고 있어 차 안이 마치 커다란 수족관 같았다. 고속도로는 어둠 속으로 끝간 데 없이 뻗어나갔다. 낮 동안, 때로는 밤 중까지도 그렇게 자주 몸살을 앓곤 하던 길이 썰렁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 다. 상하행선 모두 오가는 차량이 드물었다. 이따금씩 전방 어둠 속 저 멀 리서 한두 점 불빛이 작은 연꽃송이처럼 아련하게 떠올랐다. 그리고는 물 결을 타듯 한동안 조용히 흐르다가 점점 속도를 더하며 다가와 어느 순간 강렬한 빛을 확 내뿜으며 금세 아득히 멀어져가곤 할 뿐이었다. 가느다란 빗발이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저 을씨년스럽던 터미널 에서 출발시간을 기다리던 때는 물론, 시멘트 정글 같은 도시를 더듬어 나 올 무렵까지만 해도 공기는 건조했었다. 게다가, 바람 많은 환절기였다. 가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비단 천식 환자만은 아니던 것이다. 어쨌거나 가랑비나 시나브로 떨어져내리고 있었고, 그것은 곧 하루살이떼 처럼 전조등 불빛 속으로 자우룩이 엉겨들었다. 길바닥이 이내 검게 젖었 다. 바퀴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1번 좌석, 그러니까 출입구 곁자리를 차지한 승객은 얼굴이 앳된 아가씨 였다. 그녀는 요란한 화장술과 얄궂은 헤어 스타일 등으로 한껏 위장을 하 고 있었지만 아직 십대를 채 벗어나지 못한 나이가 분명하였다. 밤차를 탄 것일까. 조금은 얼뜨고 또 조금은 긴장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그녀는 아직 잠들지 못한 채였다. 지금 그녀의 불안정한 시선은 바로 옆 통로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군모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일병 계급장이 붙은 그 모자의 주인은 통로 건너 2번 좌석에서 고개를 잔뜩 꺽 고 잠들어 있었다. 무 밑동처럼 허옇고 맨숭맨숭한 머리통에다 동그랗게 테를 씌운 듯 모자 자국이 선명하였다. 술 냄새가 났다. 얼굴을 처박은 가 슴팍 언저리가 걸쭉한 침으로 젖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앞쪽으로 향하였다. 시야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차는 지금, 검푸른 어둠이 질편하게 고인 들판 한가운에를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 개의 거대한 팔처럼 어둠을 휘젓고 있는 전조 등 불빛 아래 기다랗게 드러누운 왕복 사차선 고속도로가 한사코 꿈틀거리 며 일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이마께가 써늘해지는 느낌이어서 그녀는 새삼 스레 벨트를 조였다. 이번에는 운전석으로 눈길을 보냈다. 운전에 열중하 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잡혀들었다. 운전사는 묵묵히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머리통이 엄첨 커보이고, 구레 나룻을 시커멓게 길렀고, 뭉툭한 콧잔등에는 적갈색의 보안경이 걸려 있었 다. 옆모습으로는 사내의 표정을 제대로 읽어내기가 어려웠지만, 그러나 어딘가 타인의 시선을 강하게 거부하는 분위기 같은 것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이마께가 써늘해지는 것을 그녀는 느꼈고, 그러자 어떤 막막 하고 무거운 감정에 잔뜩 짓눌리고 있는 자신을 새삼 의식하였다. 밤기운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버스는 지금 밤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는 중이 었다. 눈꺼풀이 자꾸만 처지는 것을 느끼며 마침내 그녀도 조금씩 잠속으 로 빠져들고 있었다. 승객들은 이제 모두 잠에 든 것 같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그 아가씨도 이어폰을 낀 채로 막 선잠이 든 모습이었다. 한 뭉텅이의 구리빛 코일같이 풍성하게 헝클어진 머릿단이 잠든 얼굴을 반이나 가렸다. 그녀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군복의 청년은 일 병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통로바닥에 버려둔 채로 열심히 코를 골았다. 여 기저기서 코고는 소리가 서로 다른 음색과 가락으로 제법 낭자하게 어우러 졌다. 그러고 보면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한 사람 - 운전사뿐이었 다. 그는 모든 숭객들을 등지고 앉은 채 묵묵히 앞만 내다보고 있었다. 승객들 중 한 사람이 잠을 깬 것은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통로 왼쪽으로 세 번째 줄 안쪽 좌석에 남편과 나란히 앉아 있던 노부인이었다. 아마도 환갑 나이는 진작 넘어섰을 법한 그 부인은 온화한 인상과 함께 꽤나 화사한 차람새여서, 바쁘고 고단하게 사는 사람들이나 신세질 이런 심야 버스에는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였다. 몇차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던 그녀는 무심히 창 밖으로 시선을 내보냈 다. 때마침 눈부신 빛 한 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갑자기 불쑥 나타나 벼락 치듯 턱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귀때기가 잘려나간 듯 얼얼해졌다. 반대편 차선으로 이제 막, 덩치 큰 짐차 하나 엇갈려 지나간 것이었다. "왜 그러나?" 옆자리의 노신사가 부스스 깨어나며 물었다. 그 역시 말끔 한 정장 차림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집안 혼사에 다녀오는 길인 듯싶었다. 은백의 머리칼하며 두텁고 축 처진 귀 등으로 보아 유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음이 분명한 그 노신사는 창 쪽으로 앉은 아내를 향해 은근히 정을 담은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어째서 소리를 지르고 그러는가? 혹 발밑에서 쥐 새끼라도 두어 마리 기어나왔남?" 그러자 옆구리를 가볍게 쥐어박는 시늉을 하며 부인이 되물었다. "이 버 스 당신은 좀 이상하지 않수?" "뭐가?" "너무 과속하는 거 같지 않느냐 말이우?" 그때서야 노신사는 차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깊은 물 속처럼 어슴 푸레한 불빛 아래 눈에 띄느니 잠에 빠져 온통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 모습 들뿐이었다. 그는 이마를 창에다 바짝 붙이고는 바깥을 한참 내려다보았 다. 검푸른 어둠이 들판 하나 가득히 출러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이 번에는 엉덩이를 약간 쳐들고 고개를 잔뜩 뽑아올린 자세로 앞쪽을 살폈 다. 운전석과 객석 사이의 칸막이 때문에 운전사의 커다란 뒤통수와 각진 어깻죽지만 드러나 보였다. "그런 것 같구먼." 노신사의 미적지근한 대꾸였다. "하지만, 뭐가 보여 야 말이지~ 꼭 굴속을 가고 있는 거 같애. 임자는 안 그런가?" 사실이 그렇다. 버스는 길고 긴 터널 속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쩌다 먼 불빛이 잠깐씩 떠올랐다 사라질 뿐. 끝없는 어둠의 터널이었다. 눈에 뛸 만한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전조등에서 쏟다져 나온 두 개의 강렬한 빛기둥만 바다 같은 어둠을 헤집고 있었다. "암만해도 과속하는 거 같아 불안해요" 노부인은, 방금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엉덩이를 쳐들고 목을 한껏 늘여 세 자리 앞의 운전석으로 불안한 눈길을 던졌다. 운전사의 앙바틈한 어깨 근육에서 그녀는 단박 팽팽한 긴 장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당신은 젊은 애들마냥 잘두 잡디다만 난 내내 깨어 있었다우. 그래서 말인데 아무래도 저 사람, 조심성이 없는 거 같애 요. 무지무지 겁없이 달리고 있다구요 지금~" "밤이라서 속도감이 더 느껴지는 건지두 모르지." 남자의 시퉁한 대꾸 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니까 그러네!" 여자가 발끈하였다. "마구잡이로 정 신없이 내달리고 있다니깐요. 저 사람 혹시 넋을 뻬놓구 앉아 있는 거나 아닌지 몰라." "설마~" 노신사의 떨떨란 대꾸다. "심야 버스 기산데. 야간 운전 한 두 번 해본 것두 아닐 테구~ 내가 보기엔 기사 양반이 뒤판이 아주 듬직한데 그래?" "뭐가 그래요? 저 뒤통수하며, 겁없이 된통 미련스런 사내 같구만 뭘!" 늙은이들답게 콩닥콩닥 입씨름을 하던 중이었다. 거칠 것 없이 내달리던 버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주춤주춤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급제동이 걸렸 다. 승객들로서는 방심한 채 잠들어 있다가 불시에 당한 일이었다. 끔찍한 소동이 벌어졌다. 벨트를 채우지 않았던 사람들은 앞좌석 등받이에다 호되 게 이마를 짓찧거나 혹은 위로 튕겨올라 선반 아래쪽을 정수리로 들이받았 다. 또 더러는 선반 위에 올려놓았던 짐이며 가방들과 함께 통로 바닥으로 털푸덕 털푸덕 떨어져 나뒹굴었다. 운전석 바로 뒤 2번 좌석에 축 늘어져 있던 일병은 벨트가 느슨했던 탓인지 통로 바닥의 그 모자 위에다 사정없 이 얼굴을 처박고 깨어났고, 그 옆 1번지 좌석의 아가씨는 반대로, 부츠를 꿴 두 다리를 허공으로 벌렁 쳐들었다가 내려놓았다. 한바탕 우스꽝스럽기 도 한 일대 소동이었지만 물론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상황은 못 되었다. 웃다니! 사실을 말하자면, 아비규환의 순간이었다. 특히 승객들이 한꺼 번에 내지른 비명소리가 실로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여러 부위의 쇳덩이 들이 갑작스럽게 서로 겯고 뒤틀리면서 일으키는 살벌한 금속성들과 뒤섞 여 승객들의 공포심을 한층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서슬에, 그동안 은 뒷자리에 박혀 보이지 않던 대여섯 살짜리 계집애 하나가 마치 뱀에 물 린 듯 날카로운 울음을 터뜨렸고, 그러자 아이의 어머니도 덩달아 발작적 으로 무슨 소린가를 마구 외쳐댔다. 한마디로,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한때 제어력을 잃고 비틀거리던 버스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었다. 덕분에 더 이상 고약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랬다. 그들을 실 은 버스는 자칫 치명적인 운명에 처할 뻔했으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절 제절명의 순간에 관성과의 저 힘겨운 대결을 가까스로 버텨냈던 것이다. 운 좋게 덫을 빠져나온 짐승처럼 버스는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다시 어 둠 속을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악몽의 순간이 지나고 나자 승객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안도감과, 그 리고 허탈감 때문이었다. 한결같이 넋이 빠진 얼굴들을 한 채 다들 멍청하 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막 끔찍한 비 극을 모면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나자 그들은 비로소 수런대기 시작하 였고, 그러자 하나둘 화를 터뜨렸다. 화살은 당연히 운전사에게로 날아갔 다. "무슨 놈의 운전을 이 따위로 하는 거요?" 감색 점퍼때기를 걸친 남자 하나가 중간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앞가슴께에 무슨 전자회사 라는 글씨가 주황색 수실로 박혀 있었다.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 하나는 울림이 썩 좋았다. "어떻게 된 거요? 당신 말이야. 방금 졸 았지? 졸음운전 한 거 아니오? 이런 식으로 차를 모니깐 밤차 타기가 무섭 단 말야!" 그러자, 그보다 두어 줄 앞쪽에서 몸집이 부대한 중년여인이 잔뜩 부어 터진 목소리로 볼멘소리를 하였다. 어디다 호되게 부딪친 듯 그녀의 얼굴 한쪽이 온통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거 봐요, 운전사 양반! 우릴 숫제 떼죽음시킬 작정이라두 했수? 어째 요렇게 베라먹게스리 차를 몰아여 글세?" 운전사에게 화를 내고 힐난하는 소리들이 잠시 더 이어지기는 했지만 그 러나 분위기는 곧 누그러졌다. 점잖은 충고가 뒤를 이었던 것이다. "잠자다가 고스란히 황천길 갈 뻔했잖아 말이야. 이보슈, 기사 양반! 지 금부터라두 사알살 좀 몰아요. 어차피 밤새우며 가기로 작정한거, 괜시리 서둘 거 없잖수? 안 그렇소?" 등산모에 카키색 파카 차림의 사내였다. 4번 좌석. 그러니까 오른쪽 창가 두번째 자리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던 그는 급 제동의 순간에 상체가 앞쪽으로 튀어나간 나머지 자칫 1번 좌석의 아가씨 위에 엎어질 뻔했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묘한 자세를 연출할 뻔하였으므로 지금도 귓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판이었다. 말을 내뱉고 나서고 그는 연신 민망스러 속웃음을 흘리고 있엇다. "어쨌거나 우리 참 낭패볼 뻔했소." 충격 때문에 약간 쉰 듯한 음성으로 노신사가 말하였다. "이보시게, 기사 양반! 제발 과속하지 말고 천천히 가 세. 길바닥도 미끄러운 거 같은데 혹 실수허면 어쩌겠나? 뭣보담 안전 운 행 제일주의로 가세나." 이런 상황이라면 마땅히 사과나 변명 한마디쯤은 있어야 할 운전사는, 그러나 시종 묵묵부답이었다. 승객들은 굳었던 입을 풀어 저마다 한두 마 디씩 내뱉었지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내는 도무지 이렇다 할 반응을 드 러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 점을 시비하지 않았다. 그런 것을 가려서 따질 만큼의 차분한 마음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는가! 지옥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등골에서 살얼음이 서걱거리는 기분이었다. 승객들은 운전사를 상대로 잠 시 화를 내고, 심야 운행의 위험을 지적하고, 안전 운행을 간곡히 당부했 을 뿐, 그리고는 이윽고 잠잠해졌다. 한바탕 소동이 가라앉고 나자 맨 마 지막에 남은 것은, 그러나 어쨌든 살아남았다는 사실의 소중함이었다. 승 객들은 그제야 안도감 속에서 그것을 오롯이 깨달았고, 그래서 각자 조용 히 침잠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사실이 그랬다. 어쨌거나,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자질구레한 사건 사고들은 그만두고라도, 툭하면 대형 참사가 터지곤 하는 세상 아니더냐.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제 하나도 없다. 세상은 지금 대란 중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발 둥개고 앉아 있을 수 만도 없는 게 또한 사람 사는 형편이다. 그날 운수에 맡기고 쏘다닐 수밖 에 달리 도리가 없다. 결국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신만은 억세게 살아 남을 수 있도록 그저 행운만 바랄 뿐, 그런데 지금 막 그 행운을 확인한 게 아닌가! 승객들 사이에는 은연중 감사 감동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렁거 리기 시작하였다. 저 노부인의 얼굴은 어느새 온화함을 되찾았고, 노신사 의 표정에는 자기 운명에 대한 깊은 신뢰감이 내비쳤다. 저 중년여인은 앞 가슴에다 두 손을 경건히 모아쥐고 있었다. 이처럼 변해버린 분위기 탓에 승객들은 지극히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들은 실은 버스가 여전히 과속 중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 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은 사내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단 한마디 사과의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점이 더 중요한데, 그 이후에도 전혀 조심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등뒤의 승객들을 단 한 번도 돌아본 적이 없었다. 백미러 쪽으로 눈길을 던지는 일도 역시 없었 다. 짐꾼처럼 튼실한 두 팔로 핸들을 감싸듯 움켜잡은 채, 전조등 불빛이 긴 터널을 만들고 있는 전방의 어둠만 묵묵히 내다보며 속도를 점점 더해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여전히 가랑비가 뿌리고 있었고, 길은 미끄러웠다. 그리고, 굽이굽이 오 르막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마도 들판을 가로막고 우뚝 솟은 산줄기 하 나를 버스가 이제부터 타넘을 모양이었다. 우람하게 뻗어나간 겹겹의 능선 들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다. 버스는 겉보기만큼은 새 차가 못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거칠게 몰아세우는 주인 때문에 늙은 짐승처럼 금방 헐떡거리기 시작하였다. 오를수록 골은 깊고 영은 높았다. 버스는 진 한 물개똥 같은 매연을 뒤꽁무늬로 줄줄 흘리면서 가파른 길을 힘겹게 기 어올랐다. 골짜기를 몇굽이 돌아 산중턱쯤 다다랐을 무렵에는 차의 진동과 소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계속 무리하게 밟아댄다면 머지않아 덜컥 멎어 버리거나 아니면, 과열로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운전사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헐떡거리는 차를 상대로 그는 가학증 환자처럼 점점더 난 폭하게 가속페달은 밟아대고 있었다. 차 안의 분위기가 다시 써늘하게 가라앉았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다면, 맨 뒷자리에 커다란 푸대자루처럼 구겨박힌 채 맹렬히 코를 골고 있는 사내 정도였다. 덩치가 보통이상인 데 다 만삭의 임산부처럼 배가 튀어나온 그 사내는 애초부터 고주망태가 된 상태였다.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하기 직전 아마도 그의 친구들일 법싶은 다른 두 사내가 힘겹게 떼메다가 그 뒷자리에 처박아두고 가버린 처지였으 므로 설사 차가 천 길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진다고 해도 쉽사리 깨어날 가 망은 없어 보였다. 그를 제외한 승객들은 모두 깨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젖어들었던 그 감미로운 감정도 말짱 사라지고 없었다. 그 대신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싶은 불길한 예감이 다시 그들의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 작했다. 버스가 깊숙하게 휘어진 산굽이를 돌아들 때마다 다들 심장이 오 그라붙었다. 확실히 저 운전사는 문제가 있다.! 승객들 사이에는 그런 의 식에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없 었다. 한결같이 뻣뻣하게 긴장된 시선들을 운전사의 뒤꼭지에다 꽂아둔 채 말없이 흔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저 운전사 말이우." 긴장과 침묵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지자 노 부인이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제정신 아닌 게 확실해요. 절대루 제정신 가진 사람이 아녜요." "제정신이 아니라면?" 노신사가 어눌하게 반문하였다. 그도 잔뜩 짓눌린 음성이었다. 부인이 잠시 주저하다가 선언하듯 재빨리 내뱉었다. "약 먹었다구요! 마 약 같은 걸 처먹은 게 틀림없어요!" 그리고는 스스로 두려운 듯 입술을 떨 었다. "설마하니~ 그럴 나이는 지난 거 같구만." 신사의 자신없는 대꾸였다. "나이하고 무슨 상관이람!" 부인은 여전히 단호하였다. "잠을 쫓느라고 흔히들 약 같은 걸 먹는다지 않수. 맨정신으로야 왜 저어겠수? 죽고 싶어 서 환장한 사람이래두 그렇지, 저 혼자두 아닌데 어째 이처럼 무지막지하 게 차를 몬데요 글세?" "버릇인 게지 뭐~" "버릇이라구요?" 부인의 음성이 날카로와졌다. "무슨 버릇? 다른 사람들 목숨은 아무래도 좋구?" 노신사의 목소리는 쥐어박힌 듯이 더 기어들었다. "아니면. 무슨 화나는 일아라두 있었나?" "화가 나요?"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만큼 노기를 담은 항변이 었다. "우리가 왜 저 사람한테 화풀이를 당해야 하는 거죠?" 노신사는 그쯤에서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꾸를 한 사람은 저 뚱뚱한 중 년여자였다. 노부부의 뒷줄에 앉아 있던 그녀는 주저 없이 커다란 목소리 로 불쑥 대꾸하고 나섰던 것이다. "댁 말씀이 옳아요. 약을 처먹었거나 미 쳤거나 둘 중에 하나라구요!" 버스가 출렁이는 느낌이었다. 승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모아 졌다. 두려움과 비난이 가득 담긴, 한결같이 차가운 눈빛들이었다. 그녀 는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다 말고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 살얼음이 잡히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사내는 그런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단지 핸들 조작에만 열중하고 있 었다. 승객들은 점점 더 심하게 헐떡거리는 엔진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침 묵 속으로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긴 오르막길의 거의 꼭대기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휴게소를 알리는 전광판 기둥이 저 앞쪽 어둠 속에서 불쑥 떠올랐다. 그러자 침묵을 깨고 노신사가 소리쳤다. "기사 양반! 우리 저기 들러서 좀 쉬어가세나!" 그는 앞쪽을 향해 오른팔을 엉거주춤 쳐든 채로 거듭 말하였다. "잠시 허리도 펴고 화장실도 다녀올 겸 말이오. 얼추 두어 시간은 온 것 같으니 까 기사 양반도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렇지 않소?" 그는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밤차 타기 가 이래서 쉽지 않은 거라. 원, 이렇게 고단허고 땀나고 숨이 차서야 어디 더 배길 오리가 있어야지~" "그래요 제발 천천히 쉬어가면서 가십시다. 나는 가슴이 할딱거려서 죽 을 지경이라구요. 두말 말고 쉬어서 가십시다.~" 노부인의 맞장구였다. 뒤를 이어 여기저기서 천성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위기는 금세 쉬 어가는 쭉으로 기울었다. 사실 상당한 시간을 달려왔고 또, 긴장했던 탓으 로 요의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갑자기 원두커피가 마시고 싶어졌고, 더러 는 따끈한 가락국수가 생각났다. 벌써부터 철그덕거리며 여기저기서 벨트 를 푸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을 태운 버스는 눈곱만치도 주저하거나 망설임 없 이 그대로 휴게소를 통과하고 말았다. 승객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승객들의 요구가 이렇듯 깨끗이 묵살당하 다니!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고도 운전기사는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말문을 트지 못하였다. 급기야는 저 중년여자 가 또 발끈하고 일어섰다. "이봐요, 운전하는 양반! 귀가 먹었어요? 다들 쉬어가자는데 왜 아무런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자 저 점퍼를 입은 사내도 거들고 나섰다. "저 양반, 너무 시건방지 구만 그래!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사람이길래 손님 알기를 뭣같이 아는 태 도냐구 지금?" "입에다가 지퍼를 채웠나보구먼, 그러니까 검다 쓰다 말 한 토막 없지." 누군가는 끌끌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승객들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고갯마루를 막 넘어선 버스가 그때부터 내리막길을 사정없이 굴러내리기 시작했던 것이 다. 본능적인 공포감이 순식간에 그들의 분노와 비난을 삼켜버렸다. 당장 의 위험이 더 다급해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과 시비할 계제가 결코 아니던 것이다. 시비는커녕, 그를 자극한 만한 일체의 언행을 삼가야 할 판이었다. 승객들은 치밀어오르는 화중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철저히 자제 해야 할 때라고 판단하였고, 그래서 다들 긴장된 침묵 속에서 운전사의 거 동만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버스는 점점 더 가속도가 붙었다. 흡사 제어장치가 고장난 차처럼 컴컴 한 골짜기를 향하여 거침없이 쏟아져내렸다. 전조등의 강렬한 불빛이 핥아 대는 길바닥은 빗물에 젖어 범들거렸다. 어둠 속에 텅 빈 채로 드러누운 그 길은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자주 꺾어졌다. 그러면 승객들의 상체가 반 사적으로 좌측 또는 우측으로 일제히 기울어지곤 하였다. 더러는 도로가 갑자기 사라지고 두 줄기 불기둥만 허공 중에 둥싯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재갈 물린 차가 온통 진저리를 치면서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었고, 승객들은 한꺼번에 요란한 비명을 토해내곤 하였다. 맨 앞자리의 아가씨와 그리고 뒤쪽의 그 어린 계집아이가 특히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은 더 날카 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피를 말리는 순간들이 흐르고 있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눈을 감은 채엿 다. 다들 벨트를 단단히 조였고, 팔걸이나 등받이 같은 것을 단단히 부여 잡은 자세였다. 그리고는, 버스가 급경사 진 코너를 돌 때마다 갈대처럼 이쪽 저쪽으로 맥없이 쏠리면서 온통 낭자한 비명들을 거푸 토해놓았다. 여자아이가 다시 까무러칠 듯 울어 젖혔고 1번 좌석의 아가씨도 마침내 어 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갖가지 끔찍한 환상들이 눈앞에 떠올라 심장과 더불어 목구멍이 온통 얼어붙어 버린 상태였다. 나중에는 비명조차 끙끙 앓는 소리로 변하였다. 2번 좌석의 일병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였 다. 그는 통로 바닥에 떨어뜨렸던 모자를 집어 꾹 눌러썼는데, 벌겋게 달 아오른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옆에서 쿨쩍거리고 있는 아 가씨와, 그리고 운전사의 완강한 뒤통수를 번갈아 지켜보면서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불끈불끈 쥐어보고는 하였다. 저 중년여인의 낯빛은 온통 퍼 렇게 죽어 있었다. 의자를 꽉 메운 채 출렁거리고 있는 몸뚱어리가 금세 바닥으로 쏟아질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쥐고서 아예 통로 바닥으로 내려앉은 사람들도 여럿이었다. 어쨌거나, 그 지옥의 골짜기를 다 내려오기까지 승객들은 엄청난 공포감 에 짓눌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산골짜기를 벗어나자마자 도로는 곧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널따란 들판을 가르면서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갔다. 가속과 급제동 사이에서 몸살을 앓 던 버스는 재갈 풀린 말처럼 다시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승객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은 그때부터였다. 얼어붙었던 입이 하나둘 풀 리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금방 험악해졌다. "야 이 개새끼야. 차 세워! 당장 세우지 못해?" 맨 먼저 울분을 터뜨린 사람은 저 점퍼의 사내였다. 체구와는 달리 워낙 목청이 큰 사람이라 그의 노한 외침은 다른 온갖 소리들을 일순 덮어버렸다. 그는 오만불손하고 방 약무인한 운전사를 당장 끌어내어 요절이라도 낼 듯이 살기등등하게 통로 를 나섰다. 그러나, 어디에고 항상 더 성급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그 보다 조금 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저 중년여인에게 기회를 선점당하고 말 았다. 그녀가 한 발 앞서 통로를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비대한 몸통에 비해 통로 공간은 너무 좁았다. 게다가 차는 또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통로를 꽉 메우다시피 하며 비척거 리는 걸음이로 운전석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이봐요, 아저씨! 지금 제정신 가지고 운전하는 거욧? 도대체 무슨 억하 심정으로 이러는 거요? 우릴 몽땅 떼죽음시킬 작정이 아니라면 뭐 땜에 이 런 식으로 차를 몰아? 대답해봐욧. 당장!" 여차직하면 머리끄뎅이라도 틀 어쥘 듯이 그녀는 삿대질을 해대며 매섭게 추궁하였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답은 커녕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여자는 더 발끈하였다. "이거 봐! 당신 귀머거리야? 사람 말이 말 같잖아 왜 대답이 없어? 귓구 멍이 처막히기라두 한 거냐구?" 그래도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사는 여전히 묵묵부답, 고집스럽게 앞 만 내다보고 있을 뿐 낯빛 한 점 변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장착 된 로봇이기나 하듯 사내의 옆모습은 냉담함을 넘어 오히려 무덤덤해 보였 다. "이 시건방진 사내 좀 보소. 내가 시방 지를 하야까시하는 중 아네!" 여자가 기가 차다는 듯 혓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찌 해볼 여 지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몹시 닝패한 눈빛을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 다. 응원군을 찾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승객들은 그녀의 거동만을 지켜 볼 뿐, 갑자기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점퍼마저 입을 다문 채 통로 중 간에 엉거주춤 서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는 곤혹감에 졌다. 당장 뺨따귀를 올려붙이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으로 격렬하게 앓고 있었지만 그 러나,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는 사실도 그녀는 역시 알고 있었다. 뜨거운 충동과 차가운 이성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승객들은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녀 의, 분노 때문에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뚱어리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벼랑 끝 상황 속에서도 버스는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 었다. 계기반의 속도계를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거의 광란에 가까운 속 도임을 족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운전사는 얼마든지 더 밟아댈 기 세였다. 가랑비가 이제는 제법 굵은 빗줄기로 변하여 앞 유리창을 두들겼 고, 곧게 뻗어나간 아스팔트 위로 물보라가 허옇게 피었다. 다른 차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더 짙어진 어둠 속에서 세찬 빗소리만 그득하게 차올랐 다. 예의 점퍼 차림의 사내는 슬그머니 제자리로 기어들었다. 넋이 빠진 표정이었다. "아주머니, 그만 제자리로 돌아가시지요." 노신사가 그녀를 달랬다. "그 렇게 서 있는 게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그러는 게 좋겠어요. 보세요, 점점 더 무섭게 달리고 있잖아요." 노부 인의 말이었다. 그녀의 저 온화하던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버렸고, 목소리 도 갑자기 십 년은 더 늙어버린 노파의 것이었다. "우리 말을 들어먹을 사 람이 아니에요. 저 사람, 기어이 큰일을 내고 말걸요? 아마 거의 틀림없이 ~ 첨부터 우릴 떼죽음시키기로 작정을 한 거라구요! 오, 하느님 아버지!" 노부인은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쿨쩍거렸다. 노신사가 아내의 어깨 를 가만히 감싸안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운전석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통로 바닥 위로 무참하게 나동그라졌다. 버스에 또 한번 급제동이 걸린 때문이 었다. 무거운 푸대자루처럼, 비좁은 공간에 메다꽂힌 탓에 여자는 사지를 버둥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못하였다. 운이 좋았다고해도 뼈 한두 군데 는 상했을 법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여럿 거들고 나서자 그녀는 연신 앓는 소리를 냈다. 어딘가 몹시 상하 게 틀림없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제자 리로 돌아간 그녀는 울분과 고통과 수치심 때문에 종당에는 어린애처럼 엉 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예의 일병이 갑자기 결연한 태도로 모자를 벗어 통로 바닥에다 팽개치며 벌떡 일어섰고, 그러자 4번 좌석의 등산모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힌 것도 그때였다. "우리 냉정합시다!" 등산모의 사내가 엉거주춤 일어서서 말하였다. "흥 분은 절대 금물입니다. 잘못하면 커다란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승객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지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 의 생명을 움켜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승객들은 가슴 섬뜩하게 깨달아 가고 있었다. 그랬다. 생사여탈의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자는 하나님도 악 마도 아니었다. 저 운전석을 차지한 채 이쪽으로 뒤통수만 보이고 앉아 있 는 바로 그 사내, 차를 타면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로 그 사내였 다. 승객들은 두려움에 가득 질린 눈으로 새삼스레 그를 지켜보았다. 여전 히 얼굴은 없었다. 하나의 견고한 벽처럼, 그들로부터 등을 돌려댄 채로 무심히 앉아 있는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앞자리에 계신 분들은 가급적 뒷좌석으로 옮겨 앉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통로에 선 채 등산모가 말하였다. "중간 이후가 그래도 안전할 듯싶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속도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느 자리인들 안 전을 보장할 수 있으랴마는, 그래도 앞자리 승객들이 치명적일 확률이 훨 씬 높다고 생각되었다. 맨 먼저 움직인 사람은 1번 좌석의 아가씨였다. 그 녀는 재빨리, 점퍼 입은 사내의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세 번째 줄에 있던 노부부는 서너 줄 더 뒤쪽으로 옮겨가서 통로를 사이에 두고 따로 떨어져 앉았다. 나란히 비어 있는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몇사람이 더 자리를 바꾸었고, 2번의 좌석의 일병은 마지막까지 주저하다가 결국 맨 뒷 자리, 저 술푸대처럼 처박힌 채 잠들어 있는 사내 곁으로 옮겨갔다. 몹시 자존심이 상해하는 표정이었다. 창 밖 어둠 속에서는 굵어진 빗발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멀리서 이따금씩 떠오르곤 하던 마을의 불빛들마저 이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세차 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든 그것을 지워버린 때문이었다. 버스는 어둡고 습기찬 공간을 꿰뚫으며 계속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였다. 바퀴소리와 엔진 소리가 활주로를 막 이륙한 비행기처럼 한결 날렵하고 매끄럽게 아우러졌 고, 그럴수록 파멸의 공포감은 걷잡을 수 없어 점점 더 커졌다. 끔찍스러 운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의 토막난 신음과 여자들의 짓눌린 울음소리가 가 냘프게 흘러나왔다. 등산모의 사내가 통로를 따라 천천히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좌우의 빈자리들을 지나 운전석 곁에까지 다가선 다음, 왼손으로 운전석 뒤의 쇠 기둥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낮춘 다음 차분하게 계기반을 들여다보았 다. 운전사의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지근거리였다. 속도계의 엄첨난 수치 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호흡이 잘 맞는 조수이거나 하듯 운전사와 똑같은 투로 전방에다 눈길을 박은 채 다시 한 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전조등 불빛은 이제 두 개의 거창한 물기둥으로 변해 있었다. 저 앞 어 둠 속으로부터 물보라가 한 가득 끓어 넘치고 있는 고속도로가 마치 머리 도 꼬리도 보이지 않는 한 마리 거대한 뱀처럼 무수히 반짝이는 금비늘들 을 털며 곧추 일어서고 또 일어서곤 하는 것을 그는 보고 있었다. 그것은 또,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대한 수렁 같았다. 예외는 있을 수 없었 다. 자신도, 운전사도, 그리고 어쩌다 운명을 함께하게 된 다른 모든 승객 들과 버스까지도 깡그리 그 속으로 빨려들고 있는 느낌에 그는 온통 압도 당하였다. 절체절명의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은 거두어들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운전석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운전사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것은 참으로 짧은 순간이었다. 운전사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혹 착각이었던가? 갈색 보안경 너머에 음험 하게 숨어 있는 눈빛은 잘 읽을 수 없었다고 쳐도 그러나, 돼지털 같은 수 염이 지저분하게 돋아나 있는, 그 검푸른 빛깔의, 입 언저리에는 분명 음 습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고 그는 확신하였다. 허리를 편 그는 아무 말 없 이 1번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어느 순간부터 차의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한 사람, 그 운전사를 제외하고는. 어는 순간부터인가 승객들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 죽음의 공포 와 사투를 벌이고 있던 그들은, 한 순간일망정,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 인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절제절명의, 피를 말리는 상황과는 너무나 이 질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코 환청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가 참으로 한가하고 태평스럽게 코를 골아대는 소리였다. 승객들은 그때서 야 비로소, 저 뒷자리에 구겨박힌 채 잠들어 있는 술꾼을 기억해냈다. 그 덩치 큰 사내야말로 참으로 상황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그는 여전히 기세 좋게 드르릉 드르릉 코를 골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왜 갑자기 그 소리가 승객들의 귀를 새삼스레 파고 들었던가? 그 것은 분명 기이한 노릇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곧 사정을 깨달을 수 있었 다. 첫째는 세차게 쏟아지던 비가 어느새 멎어 있었고, 그리고 둘째는, 이 거야말로 기적 같은 사실인바, 그처럼 고집스럽게 미친 듯이 내달리던 버 스가 어느결에 순한 나귀처럼 얌전해져 있었던 것이다. 승객들 중에는 문 득, 그렇다면 악몽을 꾸었던 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뚤레뚤레 둘러보는 사 람도 없지 않았다. 단지, 일진이 나빴던 것이다. 하필이면 지랄 같은 버스에 걸려든 게 불 운이었다. 삼십 분 앞서 출발한 차를 탔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 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무사하며, 머지않아 목적지에 닿을 것이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승객들은 차의 무리 없는 주행 속에서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 다. 긴장과 노여움이 누그러지면서 낯익은 평화 - 저 일상 중에서 종종 경 험해왔던- 가 그들의 마음을 푸근히 가라앉게 만들었다. 위험한 순가는 더 이상 없었다. 버스는 쾌적한 속도로 남은 여정을 끝내 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터미널로 진압한 차가 동체를 한두 번 가 볍게 출렁거리고 나서 점잖게 멎었고 이어 출구가 매끄럽게 열렸을 때, 그 랬다. 일부 승객들이 운전사에게 보여준 그 감사의 표시는, 그러므로 거짓 없는 감정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일테면, 저 노부인이 그랬다. 남편보다 한 발 앞서 출구로 나온 그녀는 운전사의 등을 토닥이며 거듭거듭 말하고 있었다. "운전사 양반, 정말 수고가 많았수. 얼마나 피곤하우? 정말이지 난 너무 너무 감사해~" 그녀의 얼굴은 무사 귀환의 기쁨 때문에 평소의 온화함을 넘어 거의 눈부시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노신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꽤나 지치고 시무룩한 얼굴을 한 채 천천히 차에서 내려섰는데 그 거동하며 뒷모습이 노인 티가 완연하 였다. 말이 없기로는 저 아가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지나간 시간을 이 미 마음에 담고 있지 않았다. 통로에서부터 열심히 밖을 기웃거리는 것으 로 보아 아마도 마중꾼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운전석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가 하면 저 일병은 좀 색다른 태도였 다. 차에서 내려가기 전에 그는 운전사의 정수리에다 꼬챙이 같은 시선을 박은 채 잠시 뻣뻣하게 서 있었다. 구겨진 자존심 때문에, 일병 계급장이 달린 군모를 푹 눌러쓴 그의 얼굴은 도무지 편하지가 못하였다. 더러는 한두 마디씩 감정이 담긴 말들을 뱉기도 했는데 저 대여섯 살짜 리 계집아이를 데리고 탔던 젊은 어머니가 말하자면 그런 쪽에 속했다. "당신은 애들도 없어요? 운전이라도 해먹고 살려거든 맘뽀부터 곱게 가 지라구요!" 말은 순했지만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그녀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가장 험한 말들을 뱉은 사람은 저 뚱뚱한 중년 여자였다. 한바탕 걸쭉한 욕설을 퍼부은 다음 그녀는,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면서, 진단서를 떼어 기 필코 니놈을 고발하고 말겠노라 고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종당에는 저 점 퍼 차림의 사내로부터 위로와 부축을 받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승강대를 내려갔다. 대부분의 숭객들이 그런 식으로 뿔뿔이 흩어져 간 후에도 마지막까지 차 안에 남은 사람은 둘, 아니 셋이었다. 운전사와 등산모의 사내, 그리고 맨 뒷자리에서 여전히 코를 골고 있는 그 덩치 큰 사내. 등산모의 사내가 운전석을 향해 진작부터 던져두었던 시선을 마침내 거 두어들고 나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통로를 거슬러 맨 뒷자이 까지 갔고, 거기서 한동안 실랑이를 치른 끝에 아름드리 술푸대처럼 출렁 거리는 사내를 떠메다시피 하여 다시 출구 쪽으로 나왔다. 그동안 운전사 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두 팔은 여전히 핸들을 감싸쥐고 고개를 약간 꺾 은 채로 그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덩치 큰 취객을 떠메고 차에서 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등산모의 사내 는 그 힘겨운 노력 중에도 운전사의 거동을 놓치지 않았다. 비좁은 출구를 간신히 빠져나온 다음 그가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운전사의 얼굴이 비 로소 이쪽을 향해 정면으로 열려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보안경을 벗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그저 맥빠지고 꾸적꾸적한 얼굴이 하나 거기 있 었다. 해설 : 김윤식 문장의 정확성이 우선 돋보인다. 모든 것이 과거형으로 표현된 이 강렬 성이 심리적 유추라든가 의식의 과잉을 막아내고 있다. 그것은 단호함의 일종이다. <승객들은 이제 잠이 든 것 같았다>라고 함으로써, 또는 <밤기 운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라고 함으로써 작가는 의식의 과잉을 억제하고 있다. 구성력의 투철함이 또한 작품의 완벽성을 보장하고 있다. 버스의 출발에 서 발단되고, 버스의 달리는 과정이 전개되고 마침내 버스는 종착점에 이 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한 최대의 예술적 공식인 시작, 중간, 끝이 이 작품에서 강렬하고도 선명하다. 절대로 앞에 무엇이 와서는 안 되며 절 대로 뒤에 무엇이 와야 하는 것이 시작이랴면, 앞과 뒤에 절대로 뭐가 와 야 하는 것이 중간이며 앞에 뭐가 절대로 와야 하지만 뒤에 뭐가 와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 끝이다. 이 작품이 지닌 또 하나의 견고성은 3인칭 전지적 시점이라는 점. 전지 적 시점이되, 여기에는 이를 억제하는 노력이 가해짐으로써 한층 그 전지 성의 의미를 뚜렷이 하고 있다. <같았다>라는 표현의 빈번한 사용이 그것. 전지적 시점이 곧 무소부지의 신의 시점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로 써 뚜렷해졌다. 버스의 내부에 국한된 시점이기에 극히 제한적이어서 당초 에 초월적인 수 없게 마련. 허황해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전지적 시 점의 이러한 제약성의 현대적 의의가 미덕의 일종으로 인식되는 것은 웬 까닭일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발표되는 것의 모든 소설이 <나>로 시작되 고 있음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몫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 아니겠는 가. 끝으로 이 작품은 단편의 단편스러운 결말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